해동의 증자라 불리던 의자왕, 신라를 침범해 30개 성을 빼앗다, 집권 후반기 여색에 빠져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백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의자왕은 어릴 때는 효심이 깊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으며 지혜로워 동방의 해동증자로 불렸다.
수수께끼의 서동,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삼십 대에 세자로 책봉됐다. 의자왕으로 왕좌에 오르면서 선정을 베풀며 성군 소리를 듣는 한편 직접 신라 정복전쟁에 나서 30여 성을 빼앗는 성과를 올렸다.
무왕에 이어 나라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집권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여색에 빠져 정국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678년 백제의 막을 내리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의자왕이 신라의 주적이 되어 삼국통일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던 것은 대야성 전투에서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여 성문에 내걸었던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김춘추의 뿌리 깊은 원한으로 결국 의자왕은 백마강 낙화암에서 3천 궁녀가 투신해 꽃 무리로 지는 전설을 남기는 주인공이 되고 있다.
-출생: 백제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해동의 증자로 불릴 정도로 효심이 깊고, 형제간에도 우애가 두터웠다. 정확한 출생연도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아버지인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595년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유명한 설화를 기록한 삼국유사는 서동이 백제 무왕이고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 했다. 선화공주가 의자왕의 어머니라고 설명한다. 의자왕이 즉위 초기 정치적 입지가 취약했던 이유는 외가가 적국인 신라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설득력 있다.
의자왕이 태자에 책봉된 것은 632년, 무왕 33년의 일이다. 삼십 대 중반이 넘어서야 태자로 책봉된 것이다. 그에 대한 내부 견제가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의자왕 즉위: 의자왕은 641년 왕위에 오른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동생인 교기와 여동생 4명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는 전격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거나 그 원인이 되었던 인물들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백제 멸망을 가져온 원인도 이때 비롯됐다. 윤충을 보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키면서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을 비참하게 죽였다는 데 있었다. 딸과 사위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고구려, 왜, 그리고 당나라를 직접 방문하며 목숨을 건 외교전을 벌인 끝에 결국 당나라와 군사연합을 맺어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의자왕의 타락: 집권 15년을 넘기면서 의자왕은 크게 변했다. 그해 태자궁을 수리했는데 대단히 사치스러웠다. 이듬해 왕이 궁인들과 더불어 주색에 빠져 마음껏 즐기고 술을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의자왕 17년에는 왕이 아들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각기 식읍을 내려주기도 했다.
의자왕의 치세가 흐트러진 이유는 은고라는 여인이 의자왕의 마음과 함께 권력을 거머쥐면서 벌어진 전횡 때문이다. 권력 기반을 다진 의자왕이 외형적으로 왕권이 안정되자 긴장감이 풀어진 탓이라는 해석도 있다.
예상치 못한 연합군의 공격에 백제의 조정은 대책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의자왕은 우선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황산에 가서 신라군에 맞서게 했다. 백제군은 열 배가 되는 적들과 만나 네 번 접전해 네 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 마침내 패전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삼천궁녀: 의자왕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백제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역사서에는 삼천궁녀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전쟁의 승자 신라인의 시각에서 전하는 적장의 부정적인 모습으로 왜곡되고 있다. 당시 사비성의 인구가 5만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3천 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렵다.
의자왕은 지혜롭고 용맹했던 무왕과 선화공주의 맏아들로 태어나 엄격한 수업을 받으며 훌륭한 인품을 가진 인물로 성장했다.
그러나 무왕이 백제 귀족들의 전략에 따라 많은 후궁을 들여 50여 명의 자식을 두게 되면서 후계구도가 복잡하게 경쟁적인 형상으로 전개됐다.
왕실에 여식을 들인 귀족들은 자신들의 입지 강화를 위해 제각각 외손을 태자로 책봉하려는 권모술수를 펼치며 의자왕의 태자 책봉에 태클을 걸었다. 의자왕이 신라인의 핏줄이라는 것이 가장 큰 핑계로 거론되었다.
무왕의 안정적인 왕권 유지를 위한 강력한 의지로 결국 의자왕은 삼십 대 후반에 태자에 책봉되고 이어 왕위를 이어받았다. 의자왕은 왕위에 즉위하면서 태자 책봉에 걸림돌로 작용했던 세력들은 거침없이 숙청을 단행했다. 또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신라를 보란 듯이 짓밟는 전쟁의 정복군주가 되었다.
은고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남장을 한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의자왕은 이성적으로 눈을 뜨게 되고, 온전히 목숨을 바쳐 헌신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여장부 은고의 치마폭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의자왕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은고와 후궁들의 치마폭에 빠져 나랏일을 잊은 5년, 귀족들의 문란한 정치가 낙화암 삼천궁녀의 전설을 남기며 백제의 문을 닫게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