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은 용의 아들, 위덕왕 또는 법왕의 아들 등으로 수수께끼 속의 인물||용의 아들로 마를
무왕이 즉위 당시 왕궁은 사비성, 지금의 부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왕은 익산에 집착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익산에 미륵사를 건립한 것과 그가 생전에 자신의 무덤을 익산에 마련한 것도 그중의 하나다.
삼국유사에서 미륵사지는 무왕이 선화공주를 위해 지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미륵사지 서탑 사리봉영기에서 무왕의 왕비는 당시 최고의 귀족 사씨 가문의 딸이라 기록하고 있다.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가 미륵사 서원의 발원 주체라고 명시하고 있다.
무왕 시기에 백제는 신라와 13차례의 전쟁을 벌였다. 당시 접경지역의 백성들은 신랑과 각시처럼 평화적인 분위기를 희망해 서동 설화를 꾸몄을 가능성이 있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익산에서 발굴된 대왕묘는 무왕의 묘이고, 쌍릉으로 불리는 서쪽의 소왕묘는 당연히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전해졌다. 고려사에서 익산에 말통대왕과 왕비의 무덤이 있다고 뒷받침한다. 전주박물관의 익산 쌍릉발굴보고서에는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토기와 20~40세 여성의 치아가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선화공주의 무덤일 것이라 주장하며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단순한 설화가 아닌 역사라고 해설하기도 한다.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 이다.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서울의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 그 못의 용과 정을 통해 그를 낳았다. 어려서 이름은 서동(薯童)인데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마를 캐서 팔아 생활했으므로 사람들이 이름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가 세상에서 둘도 없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서동은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갔다.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었더니, 아이들이 그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꾀어 “선화공주님은/ 남모르게 짝지어 놓고/ 서동 서방을/ 밤에 알을 품고 간다”는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다.
공주가 유배지에 도착할 즈음 서동이 나타나 절하고는 모시고 가려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 몰랐지만 우연이라 믿고 기뻐했다. 그래서 서동이 공주를 따라가게 되고 몰래 정도 통하였다. 그런 후에야 공주는 서동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 노래대로 이루어지는 기묘한 체험에 놀랐다.
그들은 함께 백제로 갔다. 어머니가 준 금을 꺼내어 살아갈 길을 의논하려 하자 서동은 크게 웃으며 “이게 무슨 물건이오”라고 묻자 “이건 금인데 백년은 부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고 했다.
서동은 그러자 했다. 그래서 그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용화산의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에게 가서 금을 옮길 방법을 물었더니 “내가 신통력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라고 했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신라 궁궐로 금을 보냈다. 진평왕은 신통한 조화를 기이하게 여기고 높이 받들어 주면서 자주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거동하는 길에 용화산 밑의 큰 연못가에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수레를 멈추고 절했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가람을 세우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고 말했다.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이다. 위덕왕이 궁궐 남쪽 연못가에서 연회를 즐기다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출생해 궁궐 밖에서 성장했다. 위덕왕은 당시 아버지 성왕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해 국권을 안정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때문에 아들들의 불화를 우려해 궁궐 밖에서 무왕을 돌보면서 무예는 물론 왕족으로서 자질을 키울 수 있도록 많은 교육도 받도록 지원했다.
무왕은 뛰어났던 성왕과 위덕왕의 자질을 타고 태어나 매우 현명했다. 신체적 조건 또한 늠름한 모습에다 무술을 연마하기에 최적의 상태를 갖추어 기마술, 창과 칼, 활 솜씨까지 빼어나게 뛰어났다.
서동은 신라의 서울, 궁궐에까지 드나들면서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의 빼어난 미모를 흠모하여 사랑에 빠져버렸다. 서로 마음이 통하게 된 서동과 선화공주는 꾀를 내어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다. 선화공주가 남몰래 밤마다 남자를 만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궁궐에서 쫓겨나는 공주를 서동이 백제로 데려와 결혼하게 되었다.
무왕의 선화공주에 대한 사랑은 끔찍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는 밤낮 왕비를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했다. 집무실에서조차 옆에서 말동무 삼아 나랏일도 함께 의논했다. 선화공주 또한 지혜로워 무왕의 집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무왕이 고구려와 한강 유역을 두고 전쟁을 하면서 신라와의 전쟁도 피할 수 없어 13차례나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신라에 대한 공격은 선화공주, 왕비와 지혜를 모아 적절한 선에서 치고 물러나는 형식적인 전쟁으로 끌어갔다.
무왕은 서동으로 신라에서 첩자 노릇을 하면서 지리와 기후, 풍습까지 깨알같이 파악하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유리한 입장에서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선화공주와의 묵계로 신라와는 서로 피를 흘리는 소모적인 전쟁은 피하기로 했다.
무왕은 600년에 즉위해 41년간 나라를 다스리면서 위덕왕의 패권정치에 유연함을 더해 안정적인 왕권을 유지하며 평화의 시대를 이끌었다. 백제의 멸망을 부른 31대 의자왕은 무왕의 자질을 이어받아 뛰어난 인물로 훌륭한 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주색에 빠져 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