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

이성수

유원지에서 / 회전목마를 보았다. // 분주히 원을 그리는 / 목마의 회전 // 그러던 어느 날 / 원 속의 원을 보았다. // 또 그러던 어느 날 / 원 속의 모를 보았다. // 목마는 연방 꽃을 피우고 / 목마는 연방 낙엽을 뿌리고 // 원 속의 원이 되는/ 원 속의 모가 되는 // 유원지에서 회전목마를 보았다.

『나목(裸木)의 장(章)』 (사조사,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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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유원지에서 회전목마를 보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연상했을 것이다. 책을 항상 가까이 하는 독서가인데다 생각을 깊이 하는 선비이기 때문이다. 트로이전쟁에서 목마는 적을 기만하는 도구다. 목마 속에 숨어 트로이를 멸망시킨 희랍인들의 속임수는 후대에 타산지석 혹은 반면교재로 작용하여 적의 뒤통수를 치는 기만술과 덫을 피하는 예지를 아울러 가르쳤다. 트로이목마가 서양의 적진 잠입 장치였다면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목우유마는 동양의 군수물자 운반도구였다. 목우유마는 촉한의 제갈량이 군량미를 옮기기 위해 고안한 목우와 유마다. 전쟁터에서 쓰이던 목마가 집안으로 들어온 건 일대사건이다. 목마는 초원을 달리는 꿈을 키우는 육아도우미로 변신한다. 목마는 그 얽힌 사연이 풍성하여 시인이 천착하기엔 안성맞춤이다. 이쯤에서 시인은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를 읊조린다. 아니, 박인희의 노래, ‘목마와 숙녀’를 흥얼거릴 수 있다. 시인으로서 ‘목마’의 상징적 의미를 생각하는 일은 일종의 숙명이다. ‘목마’는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계속 반복해서 흔들리는 말아닌 말이다. ‘목마’는 현실에서 유리될 수밖에 없다. 어른이 된 아이는 목마를 버리고 떠난다. 목마는 인간 운명의 상징이다.

유원지에 온 사람들은 목마를 추억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마를 탄다. 목마는 회전한다. 움직이지 못했던 목마가 움직인다. 그러나 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동일한 궤적을 맴돈다. 분주히 원을 그리는 목마의 회전을 본다. 지구가 돌아가 듯 목마도 세상을 돈다. 둥글둥글 돌아가는 인생사가 거기에 숨어 있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던 목마도 이젠 세상이치를 알게 된 모양이다. 시인은 괜스레 기분이 좋다. 그래서 유원지를 지나는 길엔 버릇처럼 회전목마를 유심히 보라본다. 그러던 어느 날 회전목마가 두 줄로 늘어서서 돌아가는 모습을 관찰한다. 원 속의 원이다. 커다란 원을 그리기도 하고 그보다 작은 원을 그리기도 한다. 자기가 가는 길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지 원이 크고 작은 게 무슨 대수일까. 자기 앞에 펼쳐지는 인생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하면 되는 걸 보여준다. 원 속에는 상상하는 만큼의 무수한 원이 존재하는 셈이다. 또 그러던 어느 날 회전목마가 멈춰 섰다. 목마의 정체는 모난 모습이다. 원만한 원 속에 모가 존재한다. 모난 모습도 돌아가는 세상에서 원만한 원으로 변한다. 원 속의 모는 원이다. 불완전한 인간은 원이라기 보단 모다. 모를 갈고닦는 끊임없는 노력 속에 원이 시현된다. 세월이 흘러 꽃이 피고 또 낙엽이 진다. 꽃 같은 청춘은 가고 백발이 찾아온다. 갈 사람은 가고 새 사람이 온다. 세상이 변해도 인생은 회전목마처럼 돌고 돈다. 원 속에 원이 있고 원 속에 모가 있다. 윤회의 굴레가 돌아가고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간다. 오늘도 회전목마가 돌아간다. 박인환 시인은 목마에서 절망과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았지만 이성수 시인은 회전목마에서 희망과 미래를 찾아내었다. 한강의 기적을 만든 정신을 발견한다.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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