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삼국유사 기행 (50) 김부대왕 (하) 신라와 남산의 신

천 년 신라의 사직 왕실의 타락으로 패망, 남산신의 끊임없는 경고 무시한 결과

신라 천 년의 흔적은 경주지역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남아있다. 경주의 역사유적지구 대릉원 내부 155호 고분 천마총은 신라 초기 왕족의 권위와 당시의 문화를 상상하게 한다. 지증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천마총 내부.
세계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라는 기원전(BC) 57년에 건국해 935년까지 화려한 문화를 일구었다. 그 시작은 지금의 경주 남산자락이었다. 현재 경주시 행정구역이 신라가 고대국가로 출발할 때의 영토와 비슷하다.

신라는 한반도에서 백제, 고구려와 삼국의 견제 형태에서 가장 힘이 약한 나라로 손꼽히며 때로는 백제와, 때로는 고구려와 손을 잡아 나라를 유지해 왔다. 그러던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고, 삼국통일을 이루는 주인공이 되었다.

신라는 일찍이 불교를 국가적인 정신문화로 발전시켜 국론을 통일하는 정신문화자산으로 육성하고, 화랑정신을 청소년들에게 파급시켜 뛰어난 인재를 육성하는 정치적 전략을 도입해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경주지역 시가지에는 고분이 즐비하다. 천마총처럼 고분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금관총을 다시 발굴, 복원하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금관총 복원 가상도.
김춘추, 김유신과 같은 걸출한 인재들이 나라의 힘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통일을 이뤄냈다. 문무왕과 신문왕과 같은 훌륭한 군주와 원효, 자장, 의상, 원광, 혜공 등의 유명한 인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한때 세계 최고의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는 나라로 발전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망과 향락에 젖어버린 지도층의 타락은 신라를 패망의 길을 걷게 했다. 신라는 붕괴하면서 다행스럽게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위험을 예방하는 길을 택했다. 고려의 후삼국통일이 가져온 새로운 평화였다. 신라의 국정 운영 방향이 기울어질 때마다 남산의 신이 나타나 경계했던 이야기는 역사 전반에 전설처럼 전해온다.

신라 삼국통일을 이루는 최후의 전투가 되었던 당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설립됐던 사천왕사의 탑지에서 발굴된 신장상의 조각. 양지 스님의 솜씨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김부대왕

사론에서는 이렇게 논했다. 신라는 박씨와 석씨가 알에서 태어났는데 김씨는 하늘로부터 금궤에 담겨 내려왔다. 어떤 이는 금수레를 탔다고 하나, 이는 더욱 괴이해 믿을만하지 못하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그렇게 전하며 사실로 믿고 있다.

이제 그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위에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는 철저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며, 관리는 적게, 일은 간단히 처리했다. 지성스레 중국을 모셔 험난할지라도 사신이 오가는 것을 끊이지 않았고, 늘 자제를 보내 그곳 조정에 나가 지키며, 학교에 보내 공부하게 했다. 그리하여 성현의 가르침을 익히고, 거친 풍속을 고쳐 예의를 갖춘 나라로 만들었다.

또 중국 군대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지역을 빼앗아 군현을 두었으니, 가장 번성할 때이다.

그러나 불교의 법을 섬기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했다. 마을마다 탑이 즐비하게 서고, 여러 백성이 중의 옷을 입고 숨자, 군대와 농업은 점차 줄어들어 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졌다. 어찌 어지러워 망하지 않으리오.

게다가 경애왕은 이보다 더해 나쁜 놀이에 빠졌다. 여러 궁인과 함께 포석정에 놀러 나가 술 마시며 늘어지게 즐기다 견훤이 쳐들어온 것도 몰랐다. 문밖의 한금호와 누각 위의 장려화 사건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경순왕이 태조에게 항복한 것은 비록 어쩔 수 없어 그랬다고 하나 잘한 일이다. 그때 만약 죽을 힘을 다해 싸워 태조의 군사에 저항하다가 힘이 부치고 세력이 다했다면 왕족이 몰살당하고 피해는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왕궁의 창고를 닫고 군현의 문서를 만들어 항복했으니, 새로운 조정에 끼친 공로와 백성들에게 끼친 덕이 매우 크다.

옛날 전씨가 오월의 땅을 가지고 송나라에 들어왔을 때 소동파가 그를 충신이라고 했는데 이제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씬 크다.

신라의 가장 화려한 문화를 볼 수 있는 불국사의 건축. 불국사의 석가탑과 대웅전.
우리 태조 임금은 비와 빈이 매우 여럿이고 그 자손 또한 많지만 현종은 신라의 외손자로 보위에 올랐다. 이후 왕권이 이어진 것이 모두 그 자손이니 어찌 음덕이 아니랴.

이미 신라가 강토를 바치고 나라가 없어진 다음이었다. 아간 신회는 외직을 끝내고 돌아와 허물어진 도성을 바라보며 ‘서리리’ 같은 탄식을 하다 노래를 지었다. 노래는 없어져 알 수 없다.

경주지역에서 역사문화유적 발굴 작업이 전개되면서 하나씩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난다. 황복사지 일대 발굴에서 새로운 건물터와 십이지신상 등의 유적들이 드러났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천 년 신라의 종말

천 년 신라의 출발은 서남산자락 나정이다. 육부 촌장들이 힘을 합해 나라의 건설에 합의하고 훌륭한 자질을 가진 혁거세를 첫 번째 왕으로 옹립했다. 서남산자락에 궁궐을 짓고 고대국가로의 출발을 선언했다.

혁거세는 남산신의 아들이다. 신성한 땅, 남산 일대에서 인간들이 벌이는 죽고 죽이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로운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아들을 인간의 리더로 보냈다. 혁거세는 60여 년 신라를 다스리며 절대적인 힘과 덕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열었다.

혁거세로부터 신라인들은 양보하고 이해하는 덕목으로 서로 배려하는 이웃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고 실천했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에서 힘의 균형을 깨뜨리려는 도전을 계속해오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전쟁이 다시 이어졌다.

경주 남산은 신라의 시작에서부터 멸망까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지다. 용장골의 용장사지삼층석탑 전경.
남산신은 수시로 신라왕 앞에 나타나 경계의 메시지를 전했다. 소지왕이 궁궐을 수리하고, 명활성에서 다시 월성으로 들어갈 때 서출지에서 편지를 전해 왕의 시해를 막았다. 선덕여왕 이후 급격하게 약해진 왕권 강화를 위해 김유신 장군을 통한 절대적인 무도를 전해 나라를 안정에 들게 했다. 절대적 강한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고 폭넓은 평화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또 망덕사 낙성식에서 어린 효소왕 앞에 남루한 승려의 모습으로 남산신이 나타났다. 지혜를 동원해 나라를 보살필 것을 경계했다. 원성왕 때에는 죽은 충신의 입을 통해 경계 메시지를 전해 왕이 사냥을 그만두고 국정을 보살피는 데 전념하게 했다.

헌안왕과 헌강왕 때에도 용의 모습으로 나타나 나랏일을 돕기도 하고, 잔치판에 나서 왕의 눈에만 보이는 춤으로 경계하게 했다.

삼국유사가 신화와 전설로 기술한 역사 이야기는 다양한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한다. 소지왕의 목숨을 구하게 한 노인이 편지를 들고 출현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서출지.
그러나 신라의 지도자들은 남산신의 직접적인 경계와 간접적인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향락에 빠져 국력이 쇠락하며 급기야 패망하고 말았다. 남산신은 신라 사람들을 아껴 나라의 평화를 추구했지만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신라사람들은 처음부터 남산에 의존해 살았다. 남산에 첫 궁궐을 지어 나라의 살림을 시작한 데 이어 삼국통일을 이루고, 남산중턱에 대규모 산성을 짓고 창고를 건설해 풍요로운 삶을 이어가도록 상징적인 장치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서남산에 포석정을 지어 향락에 빠졌다. 남산신은 이를 경계하기 위해 춤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나 이를 망각한 퇴폐적인 국정으로 망국의 길을 가게 됐다. 남산에 신라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이를 반면교사로 삼게 한다.

남산의 신은 여전히 건재하다. 오천만 년 전 바다에서 불쑥 솟아오른 경주 남산은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다. 바람과 눈, 비로 씻고 다듬어 풀과 나무가 자라게 하고, 다람쥐와 노루가 뛰어놀게 했다.

경주 쪽샘지구에는 이름없는 많은 고분이 즐비하다. 그중 44호 고분을 체험형 발굴관으로 구성해 역사문화체험 관광산업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발굴 조사 현장을 2층 관람대에서 볼 수 있게 했다.
500m의 키 낮은 산이지만 오묘하고 신비로운 기운을 가진 산이다. 바위산이 연출하는 풍경은 금강산에 비추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갖가지 형상으로 계절별로 신비로운 풍경을 만들고, 계곡과 바위마다 공부될만한 전설을 품고 있다.

오늘날도 경주와 내국인은 물론 전 세계에서 남산을 찾는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는 것도 남산신의 보살핌과 무관하지 않다. 험난한 코스, 특히 칠불암에서 암벽을 타고 오르면 깎아지른 절벽에 위치하고 있는 신선암은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그러나 그 많은 탐방객이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누구도 절벽 아래로 추락하거나 상처를 입은 사례는 발생하지 않았다. 남산신의 보살핌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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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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