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경찬

대구예총 정책기획단장·시인

새해 들어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올해는 정초부터 고향 발걸음이 바쁘다. 태국에서 사업하는 지인이 동해안의 미항(美港)인 축산항 바다가 훤히 보이는 좋은 터에 별장을 짓겠다고 하여 그 진척을 확인하기 위해 고향에 자주 내려갔다. 지난주에도 고향에서 일을 마친 뒤에 이왕 온 터라 어릴 때 살던 영덕 병곡 백석리와 그 앞에서 펼쳐진 명사 이십리 고래불 해변을 걸었다. 겨울 고래불은 한산하지만 밀려오는 파도 속에서 옛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그 사이 강산이 다섯 번 바뀔 정도의 오랜 세월은 지났지만 내 마음에 비쳐나는 고래불 풍경은 예전 그대로이다. 가까이 보이는 바다풍경이나 저 멀리보이는 산세는 그때와 비교해도 변함이 없다. 울음 우는 갈매기 소리나 파도가 밀려와서는 흰 포말을 가르는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지겹지 않다. 고래불 해변은 내 젊은 한때 고생하던 시절이 낭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고, 또 이곳이 고려말 대학자 목은 이색 선생의 자취가 묻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필자는 고래불 해변에서, 지금은 자수성가해 훌륭한 기업인이 된 친구와 함께 여름한철 장사를 하면서 고생했던 추억이 새롭다. 그때는 회를 팔고 파라솔을 빌려주며 또 해수욕객들의 인명을 구하는 등 청춘을 바쳐 일했지만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이 장사를 그만하고 장래를 위해서는 고래불을 떠나야지 생각이 많았던,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리움 속을 쫓는다.

‘고래불’은 고려삼은(三隱)의 한 분이신 목은 이색 선생의 말에서 연유됐다고 한다. 영해 괴시리가 외가인 이색 선생은 괴시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유년 시절 고래불 맞은편 산으로 올라가서 동해바다를 볼 때에 고래 떼를 보고, 또 고래가 물을 뿜는 모습을 보고서는 ‘고래뿔’이라고 해서 이곳 지명이 고래불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동해 영덕 앞바다에서 밍크 고래 무리들이 출현한다고 하는데, 예전에도 영해 앞바다, 이곳에서 고래가 많이 서식하고 유영했음을 알 수 있고 이색 선생은 ‘관어대부’를 노래했다.

‘목은시고’ 권1에 실려 있는 관어대부 서(序)에는 ‘관어대는 영해부(寧海府)에 있는데, 동해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어 바위절벽 밑에 유영하는 물고기들을 셀 수 있어 관어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해부는 나의 외가가 있는 곳인데, 중원(中原)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부를 짓는다’ 고 밝혔다.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영해의 동쪽 언덕, 일본의 서쪽 물가에는 큰 파도만 아득하고 그 나머지는 알 수가 없구나. 물결이 움직이면 산이 무너지는 듯하고, 물결이 잠잠하면 닦아 놓은 거울 같도다. 바람 귀신이 풀무로 삼는 곳이요, 바다 귀신이 집으로 삼은 곳이라. 고래들이 떼 지어 놀면 기세가 창공을 뒤흔들고 사나운 새 외로이 날면 그림자 저녁놀에 잇닿네. 관어대가 굽어보고 있으니 눈에는 땅이 보이지 않는구나…(이하 생략)’

관어대소부에서 이색 선생은 고래의 유영 모습을 보면서 자연의 이치를 떠올려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앎에 이른다’는 격물치지를 역설했던 것이다.

이색 선생은 ‘관어대소부’에서 주 문왕의 시 ‘어인’에 숨겨진 중용의 큰 뜻을 말하고 있다. 자신이 관어대에서 물고기들이 노니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인’을 상기했고, 빠른 물고기든 느린 물고기든 다 하늘의 이치에 따라 나름의 세상살이를 하고 있음을 보았다는 얘기다. 한 마디로 자연의 이치에 모든 답이 들어있다는 게 목은 이색 선생의 가르침이다.

우리사회의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면에서 정도(正道)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해 국민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현실이다. 요즘처럼 세상일이 답답하고 어지러울 때 고래불을 찾아와 고생하던 때를 떠올리고 또 고향의 대표적인 옛 선현의 올곧은 가르침을 곱씹어 본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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