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 황외순

열한 계절을 지나 당도한 편지 한 장

지난 일은 모두 덮자, 예서 새로 출발하자

심장에 현을 켜는 말

시리도록 반짝인다

-시조집『단편같이 얇은 나는』(고요아침, 2019)

올 겨울은 눈을 보기 어렵다. 겨울은 뭐니 뭐니 해도 눈인데,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 제격인데. 동서고금에 눈을 노래한 시편은 많다. 윤동주는 눈 오는 날 눈밭에서 뛰어노는 강아지가 꽃을 그린다고 하면서 눈이 눈을 새물새물하게 한다고 노래했다. 김광균은 일찍이 눈 내리는 소리를 두고 ‘설야’에서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 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고 노래하여 많은 이를 탄복하게 만든 바 있다.

김수영은 ‘눈’에서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라고 특이한 발상으로 눈을 노래하여 우리로 하여금 깊은 사유의 세계로 들어서게 했다. 또한 그는 또 다른 ‘눈’에서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자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라고 읊조려서 간담을 서늘케 했다.

황외순은 경북 영천 출생으로 2012년 동아일보와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고, 시조집으로 ‘단편 같이 얇은 나는’을 펴냈다.​ 결핍과 공감, 길 과 그늘 혹은 어둠, 자유와 속박 그리고 미래를 향한 예지의 눈으로 ‘존재의 거처를 살피는 일’에 전념하는 시인이다. 결핍을 시조로 승화시키고자 다채로운 시선으로 자아와 사물, 세계의 이면을 부단히 살피고 궁구하면서 ‘새로운 목소리’의 발현을 꿈꾸고 있다.

황외순의 ‘눈’역시 새로운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눈’을 두고 ‘열한 계절을 지나 당도한 편지 한 장’이라고 하니 무슨 편지일까 궁금했는데 특별히 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지난 일은 모두 덮자, 예서 새로 출발하자’라는 다짐이다.

사실 지난 일을 모두 덮기가 쉽지 않다. 덮어버리려 해도 회한 같은 것이 자꾸 꾸역꾸역 떠올라 밀어내기가 어렵다. 새로 출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심장에 현을 켜는 말’인 ‘눈’으로 말미암아, ‘시리도록 반짝’이는 ‘눈’으로 말미암아 지난 일을 덮는 일도. 새로 출발하는 일도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언제나‘눈’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같은 것이니까.

조심스러운 청유형인 ‘덮자, 출발하자’라는 말에 친근감을 느끼게 되어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들게 되고, 앞서 살핀 ‘심장에 현을 켜는 말’ 즉 ‘심금’을 울리는 청각적인 말이 환한 빛인 눈으로 시각화되면서 공감각의 세계가 체현되어 ‘시리도록 반짝’임으로써 덮을 것은 죄다 덮어버리고, 새로운 출발 선상에 설 수 있음을 일러준다. 이처럼 ‘눈’은 다함없는 기대와 설렘의 정표다. 이정환(시조시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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