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삼국유사 기행 (48) 김부대왕 (상) 항복이냐 항전이냐

김부대왕 천년 신라를 고려 왕건에 바치고, 태자는 결사항전 주장하다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신라 56대 경순왕은 935년 고려 왕건에게 항복해 천년사직의 막을 내렸다. 경순왕은 고려로 신하 3천여 명과 함께 투항해 개경에서 살다 죽음을 맞았다. 경순왕의 운구행렬이 경기도 연천지방에 이르렀을 때 서라벌지역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도성에서 100리를 벗어날 수 없다고 제한해 연천에 장사지냈다.
신라 최후의 왕 56대 경순왕은 삼국유사에서 그의 이름을 빌려 김부대왕으로 쓰였다. 김부대왕은 55대 경애왕과 이종사촌 간이다. 경애왕과 경순왕의 어머니가 모두 헌강왕의 딸이기 때문이다. 신라 천 년의 종말을 가져온 후손들인 셈이다. 경순왕의 아버지 김효종은 촉망받는 화랑으로 헌강왕의 맏사위였다. 경애왕의 아버지 신덕왕 또한 헌강왕의 둘째 사위였다.

경순왕은 자신을 왕으로 앉혀준 후백제 견훤을 배신하고,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바쳤다. 927년 왕위에 올라 8년째인 935년 일이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때는 후백제 견훤은 이미 그의 아들들에게 유폐되어 있다가 도망해 고려 왕건에 의탁하고 있었다. 또 고려는 후백제가 지배하던 웅진과 운주 등 충남지역은 물론 인접한 경산, 영천지역까지 빼앗아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

신라는 지속적으로 공격해오는 후백제의 침략과 남하하는 고려의 세력에 버티기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신라 궁성에서는 끝까지 전쟁할 것인지 항복할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연일 지루하게 열렸다. 결국 경순왕은 태자를 비롯한 일부 신하들이 항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무시하고, 백성들의 안위를 도모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초상화. 1904년 화승 이진춘이 해인사본을 본떠 그린 불화의 기법이 사용된 초상.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삼국유사: 김부대왕

제56대 김부대왕은 시호가 경순이다. 천성 2년은 정해년(927)인데 9월에 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쳐들어와 고울부(현재 영천)에 이르자 경애왕은 고려의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는 날쌘 병사 1만 명을 보내서 구해주라 하였다.

이 구원병이 이르기 전 견훤은 11월에 서라벌로 들이닥쳤다. 왕궁으로 들어가서는 신하들에게 왕을 찾아내라 명하였다. 왕과 부인 그리고 첩 여러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군사들에게 끌려나왔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종용을 받았다. 견훤은 동생 부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김부대왕은 견훤에 의해 자리에 오른 것이다.

다음해 무자년(928) 봄 3월,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데리고 서울 인근에 이르렀다. 왕은 뭇 신하와 함께 밖에까지 나와 영접을 하고 궁궐로 들어가 마주 대하는데 정성스럽게 예를 갖추어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왕이 “나는 하늘의 뜻을 받지 못한 사람이오. 그러니 이런 화가 미치는 것 아닌가요? 견훤은 불의를 자행하여 우리나라를 멍들게 했소. 참으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려”라면서 옷깃을 적시며 눈물을 흘리니, 주변의 신하와 태조도 눈물 흘렸다. 몇 십일을 머물다 돌아가는데 아랫사람들이 모두 정숙하고 터럭만큼도 거스르는 짓을 하지 않았다.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에 위치하고 있는 경순왕릉은 사적 제24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언덕 위에 고분을 조성했다.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며 하는 말이 “예전에 견훤이란 자가 왔을 때에는 마치 이리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왕공이 이르자 마치 부모를 만나 뵌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청태 2년은 을미년(935)인데 10월에 사방의 토지가 모두 남의 것이 되고, 나라가 약해져 이제 더는 무엇으로 버틸 수 없게 되자, 여러 신하가 나라를 태조에게 맡기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신하들은 가부 간의 결정을 내리느라 의견이 분분해 마지않았다.

태자가 “나라가 서고 망하기는 반드시 하늘의 뜻에 달렸습니다. 마땅히 충신과 뜻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민심을 거두고 힘을 다한 다음이라야 그만둘 것이오. 어찌 1천 년 사직을 그다지 가벼이 남에게 준단 말입니까”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경순왕릉 동남쪽에 세워진 경순왕 순수비. 경순왕은 천 년 신라를 막내리게 한 힘없는 군주라는 평을 받는다. 한편 백성들을 사랑한 왕이었다는 평을 하는 학자들도 있다.
왕은 “위태롭기가 이 같으니 판세를 보아도 보전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미 강해지지도 못하거니와 약해질 것도 없어, 무고한 백성들의 살이 으깨지는 것만은 내 차마 할 수 없구나”면서 시랑 김봉휴를 시켜 글로 갖추어 태조에게 항복하겠노라 전하였다.

태자는 크게 울며 왕에게 사직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어 먹으며 생애를 마쳤다. 법명은 범공이었다. 나중에 법수사와 해운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신라 천 년 동안 외침으로 허물어진 적이 없는 궁성 월성의 동쪽 성문의 길. 문무왕이 왕궁을 확장해 지은 동궁과 월지로 이어지는 길의 흔적이 드러났다. 현재 동쪽에서 월성을 둘러볼 수 있게 열려 있는 길.
◆새로 쓰는 삼국유사: 망한 나라 궁성 지키는 사천왕

경애왕과 이종사촌이었던 김부는 적군인 후백제 견훤의 추대로 왕좌에 앉았지만 한동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경애왕의 형인 경명왕 때부터 신라는 고려에 의존하며 급속하게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급기야 경애왕 8년에는 후백제로부터 왕과 궁인들까지 잡혀 죽임을 당해 실질적인 나라의 멸망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견훤이 강력하게 세력을 키워 성장하는 고려를 상대하면서 서라벌만 접수한 신라까지 통치할 힘이 없었다. 신라를 친고려 세력에서 후백제를 지원하는 세력으로 전환시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그러나 성격이 급했던 견훤은 신라를 정복했지만 내치에 실패해 아들들에 의해 유폐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후백제의 내란은 결국 고려의 후삼국 통일을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월성의 북쪽 성벽 마루에 성벽을 쌓았던 돌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견훤이 아들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왕건에 투항하며 자신이 세우고, 아들이 다스리는 후백제 정복에 앞장섰다. 후백제를 평정한 고려 왕건은 느긋하게 기다리며 세력을 안정적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과 인접한 경산과 영천지역의 장수들까지 후백제와 고려에 투항하고, 후백제까지 평정한 고려는 세력이 크게 불어나며 안정화되었다. 반면 신라는 크게 위축된 영토와 함께 백성들도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경순왕은 이미 나라의 세력이 진한으로 출발할 당시보다 좁혀지며 군사력은 물론 경제력까지 감소하자 최종적인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판단을 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경순왕릉을 찾는 학자들과 후손, 문화탐방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삼국유사기행단이 지난해 11월 경순왕릉을 답사하며 현지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듣고 있다.
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 나라를 경영해 나갈 여력이 없다고 분석했다. 결국 935년 중요 대신들을 어전에 불러 의견을 물었다. “짐이 부덕하여 백성들이 헐벗고, 불안에 떨게 했다. 우리 힘으로 고려와 전쟁할 엄두도 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라며 왕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태자가 떨치고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신라는 천 년을 이어온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나라의 흥망은 하늘의 뜻입니다.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나라를 덥석 바친다는 것은 치욕이요, 조상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일입니다”라며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싸운다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라고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태자의 동생과 젊은 장수 몇몇도 울분을 토하며 전쟁에 나설 뜻을 밝혔다. 그러나 대부분 중신은 차마 말을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경순왕은 무겁게 그러나 결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라가 무슨 소용이랴, 백성들은 어차피 이 나라든 저 나라든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잘 먹고 잘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군주는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며 “전쟁을 하면 백성들은 또다시 죽음에 내몰리게 된다.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고려에 항복하겠다”고 선언하고 시랑 김봉휴에게 고려에 항복의 문서를 전하라 명했다.

월성은 선덕여왕, 대왕의 꿈 등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월성 동쪽의 성벽과 해자. 동쪽 성문지에 드라마 촬영지 안내판이 서있다. 천 년 신라의 왕궁터는 또 다른 천 년이 지나도 흔적으로 남아 있다.
경순왕은 이미 나라가 기울어가는 시기에 왕위에 올라 국력회복의 시기가 늦었음을 절감하고, 재위 4년에 왕건이 후백제를 물리치고 왕도를 방문했을 때 임해전에서 후하게 대접하며 항복의 의사를 타전했다. 그 때문에 왕건도 느긋하게 신라의 항복을 기다리며 고려를 안정적인 나라로 경영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경순왕이 항복의 뜻을 밝히고 문서를 작성해 고려에 바치게 하자, 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생활하다 생을 마감했다.

월성을 지키던 사천왕들은 왕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궁성을 침범하는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한 그들은 그 어떤 소용돌이에도 나서지 않았다. 오로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궁성과 당시 왕의 안위를 보살필 뿐이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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