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 정호승

나는 희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 희망은 기쁨보다 분노에 가깝다/나는 절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졌을 뿐/ 희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다/ 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 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 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 희망에는 절망이 있다/ 나는 희망의 절망을 먼저 원한다/ 희망의 절망이 절망이 될 때보다/ 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 당신을 사랑한다

정호승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창비, 2017)

인생은 고해다. 이 오래된 명제를 ‘삶은 스트레스’라는 현대적 버전으로 치환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스트레스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는 인간이 운명적으로 부딪혀야 하는 원초적인 화두이다. 삶의 고통은 인간의 숙명이라는 전제 아래 욕망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움으로써 고통이 똬리를 틀 둥지를 없애버리는 방법이 해결책일 수 있다. 본능을 조절하기가 넘을 수 없는 장벽이긴 하지만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추구해왔다. 삶의 고통을 원죄에 대한 심판이나 대가로 보고 신에게 사죄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기도 한다. 초월자를 믿고 그 가르침에 의지하는 게 요체다. 한편, 인간은 삶의 고통을 도전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을 끝없이 추구해왔다. 학문과 과학을 방편으로 상당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성과에 못지않게 새로운 스트레스를 산출해낸 부작용도 만만찮다. 이에 반해 삶 자체를 포기하는 극단적 방법도 있다. 삶을 즉시 포기하고 천국으로 가자는 종교가 있다면 사이비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삶의 고통을 대처하는 여러 가지 방법에서 공통분모를 하나 추출해보라면 단연 그 첫 손가락에 꼽히는 매개적 개념은 희망이다. 이승에선 비록 고통을 감수해야하지만 내세엔 복락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이 희망이고, 고난의 바다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그 난관을 극복하면 즐거움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신념이 희망이다. 인간은 희망이 없으면 고통 속에서 쉽게 무너진다. 희망이 희망으로써 의미를 갖는 건 절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희망 없는 희망은 뿌리가 없고 절망 없는 희망은 존재가치가 없다. 희망은 희망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 추구하는 구원의 손길이다. 희망은 절망 중에서 숨 쉬는 생명이자 어둠 속에서 갈구하는 한줄기 빛이다. 희망은 자신에게 보내는 구조신호이고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래서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이 희망이다.’ 희망이 그 생명력이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은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선 안 되기 때문이다. 절망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고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 있다. 절망 속에서 꺾이지 않고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름답다. 시인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인생은 고해지만 희망이 있어 살만 하다.

정호승 시인은 “희망의 구체성이 중요하다”며 “희망은 절망에 철저히 뿌리내리고 바탕을 두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가치”라고 말했다. 시인은 희망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노래했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부터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정호승표 시적 미학이다. 강한 부인의 호소력이 강한 긍정보다 울림이 더 크다는 시적 정서를 다시 한 번 공감한다. 역설의 미학은 소월의 진달래꽃에서 만개시킨 배달민족의 끈끈한 정서다.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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