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숙

가나의 어느 부족에선 사람이 죽으면/ 관 모양이 생전의 직업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어부였던 사람은 배나 물고기 모양/ 구두장이는 구두 모양의 관에 담긴다// 시인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는 나는/ 시집이나 펜 모양의 관을 그려보지만/ 아니다 시로써 돈을 벌어보지도 못했고/ 흔한 문학상으로 명예를 얻어 보지도 못했으니/ 시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삼십 년을 주부로 살았으니/ 밥솥이나 냄비 모양을 생각해보지만/ 아니다 전업주부라 하기엔 시와 통정한 시간이 너무 길다/ 국적없는 집시처럼 바람에 이끌리며 산 것이다// 어느 한 곳에 내 전부를 던져본 적 없어/ 작가로서도 주부로서도 이념도 없고 신념도 없다/ (중략)/ 가나식이라면 나는 죽어서도 관 모양이 없을 것 같다

- 계간⟪문학청춘⟫2017년 여름호

.....................................................

가나에선 사람이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해 축제처럼 장례가 치러진다. 밴드와 가수의 신나는 음악에 맞춰 웃는 얼굴로 춤을 춘다. 이들은 관을 중히 여기는데 관 모양은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물건으로 하거나 종사했던 직업과 관련된 모양으로 제작한다고 한다. 탱크, 물고기, 젖소 같은 모양의 관에 시신을 안치시킨다. 고추농사를 짓던 사람이 죽으면 고추 모양 관을, 생전에 콜라를 엄청 좋아했다면 코카콜라 관을, 비행기 한번 타보는 게 소원이었던 사람이면 가나에어 비행기 관에 넣어 시신의 한을 풀어주기도 한다.

우연히 가나 장례 풍습을 듣고 시인의 습성이 발동하여 ‘나는’ 어떤 관에 담겨질까를 생각한다. 자신은 ‘시인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먼저 내세울만한 신분이라 ‘시집이나 펜 모양의 관’을 떠올려보는데, ‘시로써 돈을 벌어보지도 못했고’ ‘흔한 문학상으로 명예를 얻어 보지도’ 못했음으로 당당히 시인이라 하기엔 어쩐지 멋쩍다. 그렇다면 다음은 30년차 전업주부겠는데 이 역시 큰 보람과 긍지를 갖고 임했던 역할이 아닌지라 마땅찮아 한다.

살면서 누구나 이런 ‘관’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자문을 할 때가 있다. 대개는 자기 스스로를 뾰족한 재주 없고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대부분의 집안에서 지방을 쓸 때 ‘학생부군’ 즉, ‘배우는 학생으로 일생을 살다 가신’이라고 적는 것이리라. 대다수 유생들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죽어서도 공부를 계속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평생 벼슬 한번 못해본 백수건달이라도 ‘학생’으로 살고, 또 죽어서도 ‘학생’으로 살라니 축원이라면 축원이다.

어느 당파에 가담하지 않는 것 역시 다행한 일이다. 어느 한쪽에 휘둘리지도 발목 잡힐 것도 없으니 얼마나 자유로운가. 장담은 못하지만 살아가면서 무엇이 잘못이고 무엇이 우려되는지 정도는 구분하려고 노력했다. 기본 양심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무엇인가라는 성찰적 지점에 이르면 자괴감만 가득하다. 지난 12년 동안 이 지면을 통해 시를 빙자하여 수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냈지만 이젠 입도 닫고 창문도 닫아야할 때가 온 것 같다. 모자라고 내세울 것 없어 ‘가나식이라면 나는 죽어서도 관 모양이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學生’이란 간판은 따 놓은 당상이니 이 아니 기쁘지 아니할까.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