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나 / 오규원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앉으면 중심이 다시 잡힌다/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일어서기 위해 앉는다/ 만나기 위해서도 앉고 협잡을 위해서도 앉고/ 의자 위에도 앉고 책상 옆에도 앉듯/ 역사의 밑바닥에도 앉는다/ 가볍게도 앉고 무겁게도 앉고/ 청탁불문 장소불문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밑을 보기 위해서도 앉고/ 바닥을 보기 위해서도 앉는다/ 바로 보기 위해 어깨를 낮추듯

- 시집『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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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속에서 자 본다.’ 2007년 1월, 그러니까 타계하기 열흘 전 병문안 온 지인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썼다는 그의 유작이다. 오규원의 시는 그렇듯 시가 문자로 드러낸 것 이상의 감동과 여운을 준다. ‘우리는 어디서나’를 읽으면서도 감춰진 시 너머의 의미를 찾는데 잠시 골똘해졌다. 의자에 머문 시인의 시선에서 ‘바로 보기 위해 어깨를 낮추듯’이란 지혜를 발견한다.

쉽게 읽히다가 ‘역사의 밑바닥에도 앉는다’는 대목에 탁 걸려 잠시 주춤하는데 역사를 바로보기 위해서는 어깨를 낮추고 얹힌 힘도 빼고 밑바닥도 챙겨보라는 의미로 수습한다. 의자에 앉듯 무게의 중심과 균형을 잡으라는 뜻이리라. 역사관 역시 삐딱하게 서거나 드러누워서 볼 게 아니라 차분히 앉아서 보라는 거다. 역사는 대체로 승자의 입장에서 진술되어지고 기록으로 남겨졌으며 이설 없이 교육현장에서도 통했다. 오백여 년 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것을 두고 우리는 그것을 신대륙의 발견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토착 인디언의 입장에서 콜럼버스는 침략자의 첫발일 뿐이다. 갑자기 바다 위로 솟구친 땅도 아니고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무인 대륙도 아니었다. 서구 중심적 사고에 길들여진 역사 인식을 진작 바꿨어야 했다. 탈 서구적 시각인 인디오 시선으로 바라본 역사관도 균형 있게 함께 다뤄졌어야 했다. 과거 교육 현장에서 아프리카는 식인종이 득실거리고 북한 사람은 모두 흉하게 생겨서 뿔이라도 달린 양 교육을 받았다. 아니지 않는가. 모두 왜곡되고 편향된 서구중심의 세계관과 지나치게 기울어진 우측 이데올로기 탓이 아니었던가.

지금은 북한의 대규모 군사열병식을 생중계할 정도로 북한의 정보가 여과 없이 전해지는 세상이지만 과거엔 북에 대해 입만 뻥긋해도 신상이 위태로운 시절이 있었다. 시대가 변하고 국민의식이 그만큼 성숙해졌기 때문이리라. 국사교과서에 주체사상의 개념을 소개하고 김일성과 김정은의 사진을 실으면서 3대 세습 독재정치에 대한 비판도 함께 다루어졌다면 좌 편향된 역사 기술이라고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보다는 해방공간에서의 균형을 잃은 역사해석을 포함해 무조건적인 친미사관이라든가 친일사관의 부활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사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파적 이익에 맞춰 교과서를 개편하는 자체가 역사적 난센스다. 사안에 따라 쟁점이 있을 수 있고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정파의 입맛에 맞추어 의도를 관철시키려는 오류는 없어야겠다. 최근 언론보도나 방송의 토론 프로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조국사태와 관련해서는 경마저널리즘의 전형을 보는 듯했다. 모두 차분하게 의자에 앉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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