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강왕 시대에 용왕과 남산신, 금강령의 산신과 지신 등이 나타나 춤으로 경계했으나 오해하고

▲ 울산 남구 황성동 포구의 처용암이 바다 가운데 섬으로 있다. 신라시대에 헌강왕이 나들이하던 중 안개가 자욱했는데 용왕을 위해 절을 짓겠다는 말을 하자 바로 안개가 걷혀 개운포라 불렀던 곳이다.
▲ 울산 남구 황성동 포구의 처용암이 바다 가운데 섬으로 있다. 신라시대에 헌강왕이 나들이하던 중 안개가 자욱했는데 용왕을 위해 절을 짓겠다는 말을 하자 바로 안개가 걷혀 개운포라 불렀던 곳이다.
헌강왕은 신라 하대 나라의 기운이 기울어 가던 시기에 왕위에 올랐지만 해마다 풍년이 들고, 거리에는 노랫소리 그치지 않고 평화로운 시대를 보냈다.

이는 헌강왕의 아버지 경문왕이 화랑세력과 고승들을 동원해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면서 백성의 안녕과 나라의 평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결실이 나타났던 덕이라는 평이다.

헌강왕 당시에는 많은 신이 현신했던 것으로 역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도 헌강왕이 개운포에서 용왕을 만난 것과 남산 포석정에서 남산신을 따라 춤춘 일, 금강령에서 북악의 산신과 지신이 나타나 춤을 추며 경계했다는 등의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국운이 다함을 신들이 나타나 경고를 했으나 사람들은 이를 상서로운 일로 잘못 해석하고 더욱 나태해 결국 나라가 망했다. 신들의 춤을 따라 추었던 헌강왕 시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 헌강왕이 용왕을 위해 절을 지어줄 것을 약속하자 안개가 걷히며 뱃길이 열렸다 하여 이름 지어진 개운포 바다 전경.
▲ 헌강왕이 용왕을 위해 절을 지어줄 것을 약속하자 안개가 걷히며 뱃길이 열렸다 하여 이름 지어진 개운포 바다 전경.
◆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

제49대 헌강왕 때였다. 서울부터 전국에 이르기까지 지붕과 담이 즐비하게 이어지고, 초가집이란 한 채도 없었다. 거리에는 연주와 노랫소리 끊이지 않고, 사시사철 맑은 바람이 불고, 비는 적당히 내려주었다.

이때 대왕이 개운포로 놀이를 나갔다. 왕이 가마를 돌려 돌아오다 바닷가에서 점심을 들려는 참이었다. 홀연히 운무가 가득하여 길을 잃었다. 괴이하게 여겨 곁에 있는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이 “이는 동해 용이 조화를 부린 것입니다. 좋은 일을 행해야만 풀리겠습니다”고 했다.

▲ 처용이 헌강왕 앞에 처음 나타났던 곳으로 전해지는 개운포 해변에 처용이 불렀던 노래 처용가를 적어 놓은 비.
▲ 처용이 헌강왕 앞에 처음 나타났던 곳으로 전해지는 개운포 해변에 처용이 불렀던 노래 처용가를 적어 놓은 비.
이에 신하에게 명령해 용을 위해 가까운 곳에 절을 짓도록 하였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운무가 걷히며 흩어졌다. 그래서 개운포라 불린다. 동해 용은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의 가마 앞에 나타나 덕을 칭송하면서 춤추고 곡을 연주했다.

그 아들 하나는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 왕정을 보좌했는데, 처용이라 불렀다. 왕은 급간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하여 그의 마음을 붙잡아두고자 했다. 그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다. 역신이 이 여자에게 푹 빠져 사람으로 변장하고 밤에 그 집에 들어와 남몰래 함께 자게 되었다. 처용이 밖에 나갔다가 집에 이르러 침상에서 두 사람이 자는 것을 보고는 노래 부르고 춤추며 물러났다.

“서울의 밝은 달밤/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인가/ 본대 내 것이었던 것을/ 빼앗아 감을 어찌하리.”

▲ 개운포에 있는 처용암 입구의 표지석.
▲ 개운포에 있는 처용암 입구의 표지석.
이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 앞에 나와 무릎 꿇고 “내가 그대의 처를 탐내서 지금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도 그대가 화를 내지 않으시니, 감복하고 탄복할 일입니다. 맹세컨대 지금부터 이후로는 그대의 얼굴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나라 안의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한 것을 몰아내고 좋은 일을 맞아들이려 했다.

왕은 돌아온 다음, 영축산의 동쪽 기슭이 좋다 하여 절을 짓고 망해사라 불렀다. 신방사라고도 하는데 이는 용을 위해 지은 것이다.

또 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이다.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는데 곁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오직 왕만이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서서 춤추니, 왕이 손수 따라 춤을 추며 형상으로 보여주었다.

신의 이름을 상심이라고도 하므로 지금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면서 임금이 춘 상심 또는 임금이 춘 산신이라 한다. 신이 나타나 춤을 출 때 그 모습을 자세히 본 따 기술자를 시켜 조각하게 하여 후대에 보여주었으므로 상심이라고도 하였다. 또는 상염무라 하는데 이는 곧 그 모양을 보고 지은 것이다.

또 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는데 옥도검이라 불렀다. 또 동례전에서 연회를 할 때에는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는데, 지백급간이라 불렀다.

어법집에 “그때 산신이 춤을 추면서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 노래한 것은 나라 안에 지혜롭게 다스리는 자들이 미리 알고 도망을 가 도읍이 무너질 것’을 이르는 바였다”고 한다.

지신과 산신은 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을 알고 춤을 추어 이를 경고했던 것이다. 나라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났다’고 말하면서 탐락에 극심하게 빠져 나라가 끝내 망하고 말았다.

▲ 망해사 입구의 표지석.
▲ 망해사 입구의 표지석.
◆다시 쓰는 삼국유사: 헌강왕의 정치

헌강왕은 15세에 즉위해 철이 없었다. 단지 성격이 호쾌하고 활달해 화랑들과 무예를 즐기며 사냥과 놀기에 빠져 정사를 돌보는데 게을리했다.

황성숲에서 사냥을 즐겼다. 사냥터에서 만난 여인의 미모에 빠져 그곳에 쉼터를 마련하고, 여인이 그곳에 기거하게 했다. 이 여인이 남매를 낳았다. 아들은 나중에 52대 효공왕이 되었고, 딸은 53대 신덕왕의 왕비가 되어 54대 경명왕과 55대 경애왕을 낳았다. 신덕왕이 박씨 성을 가졌으나 김씨 왕가의 사위로, 결국 김씨 왕의 세습이 이어진 셈이다.

▲ 헌강왕이 지은 절 이름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망해사. 영암스님이 1957년에 옛 절의 터를 발굴해 사찰을 세웠다.
▲ 헌강왕이 지은 절 이름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망해사. 영암스님이 1957년에 옛 절의 터를 발굴해 사찰을 세웠다.
또 헌강왕이 배를 타고 개운포로 나들이를 갔다가 해적의 난을 만났다. 위기에 처했을 때 인도 상인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헌강왕은 인도 상인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이어 개운포에 인도 상인들을 위한 전용 상가를 개설하게 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헌강왕은 또 틈만 나면 연회를 열어 신하들과 함께 즐기기를 좋아했다. 왕궁과 가까운 남산으로 나들이도 잦았다. 남산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어 용포가 젖도록 술을 마시고,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취하곤 했다.

▲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남산신이 내려와 왕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헌강왕이 따라 추었다. 신하들에게는 신이 보이지 않았다고 전하는 포석정.
▲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남산신이 내려와 왕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헌강왕이 따라 추었다. 신하들에게는 신이 보이지 않았다고 전하는 포석정.
헌강왕이 20세를 맞아 생일잔치를 베풀었다. 술기운이 오르고 흥이 지나치자 남산으로 나들이를 나섰다. 이때 일길찬 신홍이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히 반란은 헌강왕을 숨어서 따르던 화랑들의 힘에 제압됐다.

헌강왕은 유흥에 빠져 있었지만 주변에 실력이 뛰어난 화랑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아버지 경문왕의 뜻에 따라 그들을 중용해 신임을 두텁게 얻고 있었다. 이어 경문왕 때부터 장려해왔던 국학을 발전시켜 6두품 세력들을 중앙 정계에 진출하도록 해 신흥세력의 지지 또한 두텁게 받아 강한 국운을 이어갈 수 있었다.

▲ 보물 제173호로 지정된 울주 망해사지 승탑. 신라 헌강왕이 동해용을 위해 세운 절이라 전해지는 곳에 스님의 유골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돌탑. 동서 2기의 승탑이 우뚝 서있다. 동탑은 1960년에 복원해 세웠다.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해석된다.
▲ 보물 제173호로 지정된 울주 망해사지 승탑. 신라 헌강왕이 동해용을 위해 세운 절이라 전해지는 곳에 스님의 유골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돌탑. 동서 2기의 승탑이 우뚝 서있다. 동탑은 1960년에 복원해 세웠다.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해석된다.
아버지 경문왕이 불교를 장려하며 고승들을 각 고을로 배치해 백성을 두루 교화하며 나라에 충성하는 기풍을 조성하고, 화랑과 6두품 신흥세력들을 고루 등용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중앙집권제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헌강왕은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태평성대한 시대를 열어가게 되는 복된 군주의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10여 년에 이르는 문란한 정치로 훌륭한 기반도 급격하게 기울어 나라의 패망을 막을 수 없었다.

나약했던 동생이 50대 정강왕으로 왕위를 이었지만 2년 만에 죽었다. 여동생 김만이 51대 진성여왕으로 등극해 상대등이었던 삼촌 위홍과 결혼했다. 위홍이 죽자 진성여왕은 화랑 두 명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문란한 생활을 이어가다 비난이 쏟아지자 결국 왕위에서 쫓겨나듯 스스로 물러났다. 이러한 신라의 왕권이 실추되는 시기를 틈타 후백제와 고려가 세력을 키웠다. 신라는 스스로 패망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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