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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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졌던 일 년이라는 시간이 저물어간다. 조금만 있으면 경자년 새해가 밝아올 터이다. 밀레니엄 시대로 접어든다며 떠들썩하던 때가 어느 덧 이십년이라니. 강산이 어느 새 두 번이나 바뀌어 가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2000년 새해, 나에게는 특별한 사건이었다. 은행에서도 숫자 인식에 혼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귀띔에 비상금을 준비했었다. 아이들이 여럿이라 급히 필요한 곳이 있을까봐서. 꽤 많이 현금화해서 빼두었다. 전산이 안정되면 다시 넣을 셈으로, 하지만 그때 준비한 비상금은 진료실에서 남의 손을 타 버렸다. 가방 채 없어져버린 것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 동안 주민등록증조차 돌아오고 있지 않으니, 어디에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밀레니엄 그해 첫 근무일, 정말 믿기지 않는 사건을 겪으면서 위안을 받은 꽃이 바로 은검초였다. 꽃은 정말 우리네 인생사와 많이 닮아 있지 않던가. 하와이 마우이 섬 할레아칼라 분화구에만 군생하는 희귀식물 은검초, 은으로 된 검과 같이 생겨서 모양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란다. 은빛 칼 모양의 풀이라는 뜻이다, 은검초는 사람의 손이 닿으면 죽는다는 신기한 이야기 때문에 더욱 신비롭게 여겨진다. 하와이의 마우이 섬의 할레아칼라 분화구 주위, 희귀종이라서 산양이나 사람으로부터 철저히 보호되고 있다. 은검초는 일생에 단 한번 꽃을 피우는데 그 뒤에는 죽어 버린다고 한다. 20년 만에 단 한 번 꽃을 피워서 1년 후 지고 나면 통째로 삭아 버리는 특이한 식물, 해발 3천m 할레아칼라 군락지에서 자줏빛 꽃을 한창 피운 은검초를 보면 통통한 잎이 은빛 칼날과 흡사해 정말 신비롭게 보이는 꽃이다. 고산지대의 악조건을 견디고 끝까지 버티고 살아서 꽃을 피워 내고 스스로 지는 꽃의 일생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십 년을 한결같은 정성을 기울인다면 못 이룰 게 없지 않겠는가. 물론 극기와 끈기는 늘 언제나 함께 해야 할 것이겠지만 말이다.

조상의 땅이라고 불리는 하와이, 태양의 집이라 불리는 할레아칼라 분화구, 해발 3천m 극한 속에서 한 방울 이슬로 목을 축이고 온몸에 형형한 은빛이 스밀 때까지 오직 돌아갈 별을 생각하며 삶을 버텨내 드디어 피우는 꽃, 황막한 영토, 메마른 땅 위에서 사람의 손길만 닿아도 죽을 만큼 오염을 허락하지 않는 신성한 기운으로 활화산 분화구에서 자라나는 은빛 칼 모양의 은검초, 그곳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정성을 쏟아 고통을 견디고 드디어 피어나는 꽃, 은검초 꽃. 신비로운 자태의 은검초가 드디어 형형한 빛을 내뿜으리라. 하와이 할레아칼라 분화구 화산재 위에 뿌리를 가까스로 내리고, 고고한 아름다움의 칼날을 번뜩이며 피어나는 꽃. 지상과 결코 섞이지 않는 그 순결한 고매함이 강철처럼 의연하게 빛나는 꽃, 영광의 빛을 발하는 이 은검초가 신비롭고 환상적인 꽃으로 피어나 삶을 매듭 지을 준비를 하리라.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매일매일 처음 가는 길이지 않은가. 오늘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만 있다면 아무리 춥고 황량한 날이 찾아오더라도 은검초의 화사한 꽃을 기대하는 심정으로 희망차게 살아가야 하지 않으랴.

한 해 동안 계획한 일 중에서 이룬 것도 많았을 터이지만, 아직 매듭 짓지 못해 아쉬움도 남을 것이다. 못다 이룬 일들일랑 잠시 접어두고 그동안 이룬 것들을 헤아려보면서 그래도 행복한 한 해였다고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해발고도 3천58m의 할레아칼라 분화구는 매우 건조해서 도저히 식물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잎의 너비가 매우 좁게 진화되고 햇빛과 바람으로 인한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잎은 칼처럼 뾰족해지고 그 잎 속에는 젤리와 젤라틴처럼 생긴 물질이 있어 기온이 상승하거나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저장한 물을 공급해 주면서 버티는 은검초. 은검초꽃이 핀 모습을 보면 정말 환상적인 광경이지 않던가. 잎에 나 있는 털은 납작하고 오목해서 빛을 반사하는 역할을 맡아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모습까지도 바꾸어가며 진화된 모습으로 세상에 적응해가는 은검초, 언제 어느 순간에서도 부단히 노력하여 피어나기를 희망하면 끝내 꽃을 피우고야 말지 않겠는가.

세상 모든 것은 언젠가는 꽃을 피워내는 황금기가 있지 않으랴. 나름의 방식대로 자기 속도에 맞추어 끈기 있게 버티다보면 언젠가는 화사한 꽃으로 피어나지 않으랴 싶다. 누구든 언제든 어느 한순간은 가장 왕성할 때가 있을 테니까. 모두에게 그 한때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니 만족의 웃음을 띠우는 그 순간을 기대하며 멋진 한 해 맞으시길.



신헌호 기자 shh24@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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