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숙
▲ 이현숙
헤밍웨이의 다락방

이현숙

재미수필가

나무가 양편으로 줄을 맞춰 서 있는 한적한 동네다. 일리노이주 시카고 교외 오크파크는 이름에 맞게 나무가 많아서 동네 입구부터 마음이 풍성해진다.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태어나 자란 집 앞이다. 초록빛 잔디를 앞치마처럼 두른 단아한 빅토리아풍의 2층 집은 큰 나무 옆에 ‘헤밍웨이의 생가 1899’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그 밑에 헤밍웨이의 출생지라고 새긴 명판이 비스듬히 누워 햇볕을 쬔다. 왼쪽에 둥근 탑 모양의 지붕이 작은 성처럼 붙어 동화의 나라에 온 듯했다.

생가는 헤밍웨이의 외할아버지가 지은 집으로 3대가 함께 살았다. 아버지인 클리렌스 헤밍웨이는 사냥과 낚시를 즐겼던 산부인과 의사고 어머니는 성악가다. 그에게는 누나 하나에 세 명의 여동생과 남동생이 하나 있다. 어린 시절 눈에 띄는 점 중 하나는 그가 다섯 살까지 여장했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당시 사진이나 이야기가 나오면 싫어했단다. 3세 때 낚싯대를 10세 때에 사냥총을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받았은 것이 그의 평생 취미가 되었다. 4세에 라틴어 학명으로 된 새 이름을 250개나 외워 아버지는 히포크라테스의 뒤를 이을 천재라고 자랑을 했단다. 어머니는 첼로를 가르쳤는데 연습때문에 학교까지 결석시키자 어깃장을 놓으려 권투를 배웠다. 어머니에게 신앙을 물려받고 성악과 악기 연주를 배운 것이 예술적 감성으로 아버지에서 물려받은 지식과 방랑성이 그의 문학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헤밍웨이 생가의 문은 잠겨 있었다. 휴장하는 시간을 확인하지 않고 온 것이 실수다. 그가 꿈을 키웠던 다락방을 보고 싶었는데 어디쯤 있을까. 그의 집을 찬찬히 둘러보지만, 알 수가 없다. 허탈해서 다리의 힘이 빠졌다. 비둘기색으로 칠해진 계단에 앉았다. 넋 놓고 있는데 남자아이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그 뒤를 엄마인 듯한 여인이 따르며 나에게 “Hi”하며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헤밍웨이도 이 마당에서 뛰어놀며 꿈을 키웠겠지.

얼마 전에 헤밍웨이가 10살 때 쓴 단편이 발견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헤밍웨이의 오랜 친구였던 토비 브루스의 자손들이 관리해오던 미국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의 한 문서보관시설에 보관돼 있었다. 얼룩진 노트에 헤밍웨이의 육필로 쓰인 작품에는 제목이 없었다. 이 작품의 내용은 1년에 한 번씩 아일랜드의 ‘로스 성’(Ross Castle)에 나타나 야간 축제를 열고, 날이 밝아지면 무덤으로 돌아가는 죽은 남성 ‘오도나에’의 얘기를 썼다고 한다. 총 14쪽 분량에는 이 작품뿐 아니라 헤밍웨이의 시(詩)와 문법 관련 규칙을 적은 내용도 포함돼 있다. 스페니어 교수는 “헤밍웨이가 작품에서 한결같이 ‘상상적 얘기’(imaginative narrative)를 펼친 것을 본 것은 처음으로 정말 놀랍고 두드러진 작품이다”라고 평가했다. 상상 속의 이야기일까? 린 호숫가 로스 성에는 요즘도 밤에 문이 닫히는 소리와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얼마 전 세계에서 유령이 나오는 장소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는데 110년 전에, 그것도 10살짜리 아이가 먼 곳의 이야기를 어떻게 썼는지 궁금했다. 그는 고등학생 때도 교내 편집을 도맡아 해서 6개월 동안 30편 이상의 작품을 교내 신문에 게재할 정도로 뛰어난 문학 천재였다.

그는 다락방에서 형제·자매들에게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데 그때의 기억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가 훗날 작품 속에서 다시 날개를 펼쳤는지도 모른다. 독서를 좋아했으니 엎드려 책을 읽었을 것이다. 누워서 새의 이름을 달달 외우며 발을 까닥거리다가 지칠 때 쯤 작은 창으로 하늘을 보고 구름에 그림을 그렸을지도, 햇살에 날아다니는 먼지의 난무를 따라 상상의 세계로 여행을 다녔을 수도 있다. 다락방은 그 어감에서 은밀하고 자잘한 추억과 낡은 보물을 보관할 수 있다는 특별한 느낌이 든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다락방을 무료로 사용하는 ‘라이터 인 레지던스’(Writer in Residence) 프로그램이 생겼다. 일 년간 집필 공간을 제공하는데 나이 제한이나 신인·기성 구분 없이 창의적인 작품을 써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원할 수 있다. 내 영어 실력이나 문학성으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기에 그냥 한번 보고 싶었다. 문향이라도 맡으려는 했는데 지나친 욕심이었나. 대문호가 문학의 싹을 키운 다락방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가 보다.

헤밍웨이는 절제된 표현 방법인 간결한 문체로 소설을 썼다. 글에 작가의 진실성이 담기면 독자는 작가가 생략한 것들을 더욱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모험적인 삶과 강한 남성미를 풍기며 연예인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면서 세계적인 명작을 탄생시킨 미국의 대표 작가 헤밍웨이. “그것을 하러 찾아갔다.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만 해내면 된다.” 헤밍웨이가 한 말이다. 내가 원했던 그것은 무엇일까. 화두로 가슴에 남는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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