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의 지원을 받아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신무왕, 3개월 만에 죽어 아들 문성왕이

▲ 신라 45대 신무왕은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의 원수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지만 3개월 만에 영원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경주시 배반동 낭산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신무왕릉.
▲ 신라 45대 신무왕은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의 원수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지만 3개월 만에 영원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경주시 배반동 낭산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신무왕릉.
흥덕왕 이후 왕좌를 두고 벌어진 권력 다툼은 치열한 혈육 간의 전쟁으로 대를 이어 길게 진행됐다. 희강왕과 민애왕에 대항해 싸웠던 김균정은 전쟁에 패배해 죽었다. 이때 죽은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완도로 도망해 장보고에게 의탁했다.

김명이 희강왕을 죽이고 민애왕으로 왕위에 오르자 김우징은 복수전을 결심했다. 우징은 장보고의 도움을 얻어 군사를 일으켜 왕도로 쳐들어가 민애왕을 죽여 복수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그가 신라 45대 신무왕이다.

신무왕은 왕좌에 앉은 지 3개월 만에 죽어 최단명 왕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아들이 46대 문성왕으로 즉위했다.

신무왕이 군사를 일으키면서 장보고에 남긴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장보고의 반란을 야기 시켰고, 해상을 주름잡으며 신라의 위상을 떨쳤던 해상왕 장보고를 허무한 죽음으로 내몰았다.

▲ 신라를 세계적인 해상강국으로 발돋움하게 했던 해상왕 장보고의 동상. 그가 태어나고 전진기지로 삼았던 완도에 우뚝 서 있다. 삼국유사는 장보고를 궁파로 기록하고 있다.
▲ 신라를 세계적인 해상강국으로 발돋움하게 했던 해상왕 장보고의 동상. 그가 태어나고 전진기지로 삼았던 완도에 우뚝 서 있다. 삼국유사는 장보고를 궁파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 신무대왕과 염장 그리고 궁파

제45대 신무대왕이 왕자였을 때 데리고 있던 신하 궁파에게 “내겐 함께 하늘을 같이하지 못할 원수가 있소. 그대가 나를 위해 제거해 주고 내가 왕위에 오르면 그대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겠소”라고 말했다.

궁파가 이에 응낙하고 마음과 힘을 함께 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울을 쳐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으로 삼아 신무왕이 되었다.

왕위에 오른 다음 궁파의 딸로 왕비를 삼고자 했으나 여러 신하가 극렬히 반대하며 “궁파는 미미한 사람입니다. 왕께서 그 딸을 왕비에 앉게 하시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고 한사코 궁파의 딸을 궁으로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 사적 185호로 지정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신무왕릉 지표석.
▲ 사적 185호로 지정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신무왕릉 지표석.
왕은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따랐다.

그때 궁파는 청해진에서 군사를 이끌고 있었다.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꾀하였다. 마침 염장 장군이 이를 듣고 왕에게 “궁파가 불충을 저지르려 합니다. 제가 그를 제거하겠습니다”라며 용감하게 나섰다.

왕은 기꺼이 허락하였다. 염장은 왕의 명령을 받들고 청해진에 가서 비서를 통해 뵙자 하면서 “저는 이 나라 왕에게 자그마한 원한이 있기에 현명하신 장군에게 붙어 이 몸의 목숨을 보전코자 하나이다”고 거짓으로 귀순의 허락을 구했다.

궁파가 이를 듣고 화를 내며 “그들이 왕에게 아뢰어서 내 딸을 내쳤거늘 무슨 염치로 나를 보려 한단 말이냐”라고 오히려 꾸짖었다.

염장이 다시 “이는 여러 신하가 말한 바이오. 나는 꾀임에 끼지 않았으니 현명하신 장군은 혐의를 두지 마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궁파가 이를 듣고 염장을 불러들여 “그대는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가?” 하고 묻자 “왕에게 거스르는 짓을 했습니다. 장군께 붙어 해코지를 면해보려 할 따름입니다”라고 둘러댔다.

궁파는 의심을 풀고 “잘 왔다”며 술을 마시며 즐거이 놀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염장은 궁파의 긴 칼을 뽑아 목을 베었다. 그러자 군사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모두 땅바닥에 엎드렸다.

염장은 그들을 이끌고 서울에 이르러 왕에게 보고하였다. “궁파의 목을 베었나이다.” 왕은 기뻐하며 상으로 아간 벼슬을 내렸다.

▲ 신무왕 김우징이 왕권싸움에서 패배하고 도망해 장보고에 의탁하고 있었던 완도. 장보고가 신라 해상무역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완도 해안.
▲ 신무왕 김우징이 왕권싸움에서 패배하고 도망해 장보고에 의탁하고 있었던 완도. 장보고가 신라 해상무역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완도 해안.
◆신무왕

신라 45대 신무왕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우징(祐徵)이다. 원성왕의 증손자로 43대 희강왕의 사촌 동생이다.

839년 4월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도움으로 서라벌로 쳐들어가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7월에 승하함으로써 재위 3개월 만에 죽어 신라 천 년 역사에 가장 단명한 왕이 되었다.

신무왕릉은 경주시 배반동 낭산 동남쪽에 위치해 사적 제18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고분의 지름 15m, 높이 3.4m다. 신라왕릉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것으로 평가된다.

죽은 뒤 제형산 서북쪽에 장사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에 의해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덤의 외부 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으로 아무런 시설이 없는 일반민묘 형태로 단순하다.

그러나 이 능이 신무왕릉이 아니고, 경주시 충효동의 사적 제21호 김유신 묘 또는 현곡면의 사적 제24호 진덕여왕릉이 양식과 연대로 보아 신무왕릉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 완도 청해진유적지 장군섬으로도 불리는 장도는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해 쌓았다. 성으로 들어가는 외삼문. 성역화사업으로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 완도 청해진유적지 장군섬으로도 불리는 장도는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해 쌓았다. 성으로 들어가는 외삼문. 성역화사업으로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왕의 약속

우징은 제륭과 김명의 군사들에 밀려 병사 절반 이상을 잃었다. 전쟁 중에 아버지 김균정이 눈앞에서 화살에 관통상을 입어 죽음을 맞았지만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살길을 찾아 도망치기에 바빴다.

집요하게 추적하는 제륭의 무리를 김양의 군사가 막아 다소 지체하는 시간을 벌었지만 김양도 살을 맞아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우징과 마찬가지로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

우징은 아버지 김균정이 상대등에 있을 때 신라의 바다를 수호하겠다며 흥덕왕에게 군사를 빌리러 왔던 장보고에게 흔쾌히 은혜를 베풀었던 것을 생각하고 무작정 완도로 필사의 도주를 감행했다.

▲ 완도 청해진유적지 장도 남쪽해변에 접안시설 또는 방어시설로 보이는 1천여 개의 목책이 남아 있다.
▲ 완도 청해진유적지 장도 남쪽해변에 접안시설 또는 방어시설로 보이는 1천여 개의 목책이 남아 있다.
우징은 도망하면서 군사적 지원을 얻게 해준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기어이 은혜를 갚겠다고 다짐하던 듬직해 보였던 사내 장보고를 기억해냈던 것이다. 예상대로 장보고는 우징을 내치지 않았다. 패잔병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힘을 추스를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장보고는 의리의 사내이기도 했지만 크게 신라의 충신이었다. 딱히 왕을 죽이는 반란군은 아니었지만 왕권을 두고 전쟁을 벌였던 우징을 탐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상대등이었던 김균정이 자신을 도와주었던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나라를 위한 일에 국록을 먹는 이가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 장보고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 완도의 장군섬 장도 입구 장도목교를 건너 들어서면 바다와 연접한 곳에 신라시대 활용했던 우물을 복원해 두고 있다.
▲ 완도의 장군섬 장도 입구 장도목교를 건너 들어서면 바다와 연접한 곳에 신라시대 활용했던 우물을 복원해 두고 있다.
장보고는 그들의 싸움에 깊이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징의 군사들에 대한 지원도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선이었다. 그렇지만 의지할 곳이 없었던 우징에게는 큰 언덕이었다. 육상으로 나가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할 판이었다.

와신상담하던 김우징에게 기회가 왔다. 김우징과 왕권을 두고 맞붙었던 김제륭, 김명이 내부적으로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우징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제륭은 희강왕이 되었고, 김명은 상대등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던 그들이 갈등을 일으켰다.

김명이 군사력을 장악하고 희강왕을 압박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희강왕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명이 44대 민애왕으로 등극했다.

▲ 당나라 장수로 이름을 날리던 장보고가 고국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에게 군사 1만을 얻어 청해진을 설치해 일본과 당나라 등 삼국의 무역 주도권을 잡았던 곳. 완도로 연결된 다리.
▲ 당나라 장수로 이름을 날리던 장보고가 고국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에게 군사 1만을 얻어 청해진을 설치해 일본과 당나라 등 삼국의 무역 주도권을 잡았던 곳. 완도로 연결된 다리.
김우징은 장보고 앞에 앉았다. “내겐 같은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원수가 있소.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김명이란 자요”라며 우징은 장보고의 군사력 지원을 부탁했다. “그대가 나를 도와 원수를 죽여준다면 내가 왕이 되어 그대의 딸을 왕비로 삼겠소”라고 약속했다.

장보고는 왕을 죽이는 일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백성이자 나라의 녹을 먹는 장군으로 최소한의 의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충한 왕을 몰아내고 자신의 딸을 왕비로 책봉해 줄 왕을 돕기 위해 자신의 수하와 군사를 기꺼이 지원했다. 그리고 그의 숙원을 해결했다. 왕의 약속을 기대하면서.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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