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이진엽

문득 깨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새벽의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수만 장의 흰 전단을 뿌리며

온 세상으로 번져 가는 조용한 외침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어둠도 밤의 아들도 아닌

오직 피가 맑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일으킨

새벽이 하얀 반란//

나는 마음속으로 손뼉을 짝짝 쳤다

- 시집『겨울 카프카』(시학,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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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과 남쪽지역을 제외한 중부지방에 모처럼 첫눈다운 눈이 내렸다. 충분한 감성이 장전될 만큼의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애매모호하지 않았고 흩날리는 눈의 풍경도 좋았다. 12월 들자 머뭇거리지 않고 마침맞게 왔다. 약간 과장하자면 나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아직도 이런 고전적인 낭만이 물씬 풍기는 약속을 실제로 가동하는 이가 있을까 모르겠지만, 사귀는 사람이 있는 사람들은 상대와 이 소식을 공유하느라 바빴으리라. 그만큼 아직은 세상 사람들의 가슴에 순수와 동심이 살아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첫눈은 연인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어린 시절 눈은 순결과 신비, 설렘과 경탄의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도시생활의 이기와 약삭빠름에 젖다보면 감흥은 차츰 떨어지고 때로 눈은 내 교통을 방해하는 성가신 강하물에 불과했다. 나이 먹는다고 서정의 노쇠화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첫눈조차 무덤덤해진다면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사실과 첫눈 오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마음속으로 손뼉을 짝짝 쳤다’함은 여전히 세상엔 목마르게 그리워할 것이 있다는 의미이다. 첫눈 오면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의 마음은 붐비고 눈송이처럼 불어난다.

사랑을 알고 평화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은 혁명 같은 그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첫눈은 가장 때 묻지 않은 곳부터 ‘조용한 외침’으로 내린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어둠도 밤의 아들도 아닌’ ‘오직 피가 맑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일으킨’ ‘하얀 반란’이다. 작은아이 세살 무렵, 사물을 감식하는 눈이 막 뜨일 때 밤새 첫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도포된 풍경을 보고선 “아빠, 외계인이 왔나봐!” 생애 처음으로 눈의 ‘하얀 반란’을 목격한 아이의 눈엔 달라진 세상이 외계인의 침공으로 보였던 것이다.

눈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잠시 세상을 달리 보이게 끔 한다. 어린 시절 장독대 위에 함지박 만하게 내려앉은 눈이며, 팔작지붕 기와 위에 우아한 곡선을 또렷이 드러내는 설경의 아름다움은 요즘 보기 힘들어졌지만 눈으로 채색된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검은 눈만 내리지 않는다면 정말 세상이 확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첫눈은 무언가 판을 갈아엎고 싶은 마음 위에도 내린다. 좌든 우든 국민들에게 도움 안 되는 쭉정이는 채에 걸러 싹 날려 보내고 정치도 좀 산뜻해졌으면 좋겠다. 세상을 갱신하고 조율하기 위한 시그널로서의 첫눈이라면 손바닥이 시뻘게지도록 ‘손뼉을 짝짝’ 치겠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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