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난감’(大略難堪)

신 영

재미 시인·칼럼니스트

당황하다 못해 황당한 때를 일컫는 것일 게다. 바로 어제 아침 그런 일을 겪었다. 한국 방문 중 인천 송도에 사는 시댁에 머물까 싶었는데, 시부모께서 중국 여행 중이라 일산의 작은 언니 집으로 정하고 조카와 조카며느리 그리고 언니가 공항에 픽업을 와 주었다. 며칠 그렇게 일산에 머무르다가 친정 부모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기 위해 경기도 의정부로 향했다. 며칠 막내 언니 집에서 머무르다 예비전도사 상담학 특강이 있어 1호선 전철을 타고 시청에서 내려 사당역을 가기 위해 2호선 순환선으로 환승하는 때였다.

아뿔싸. 작은 여행용 가방의 지퍼가 터진 것이다. 보통 때는 편안한 차림으로 다니는데 특강이 있는 날이라 정장을 차려입고 구두도 챙겨 신은 상태였으니 여러 가지 조건이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상황이었다. 작은 가방을 챙겼던 이유는 건강 검진을 받고 싶어서 예약을 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옷가지와 신학공부를 하는 예비 전도사들과 두 교수님께 내 산문집 몇 권을 전해드리고 싶어 욕심을 냈던 것이다. 그리고 랩탑과 편안한 부츠를 넣고 있었으니 가방 속은 여유없는 폭발 직전이었던 것이다.

계단을 몇 내려가다가 퍽 소리와 함께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말 ‘대략난감’ 상황이었다.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고 잠깐이지만,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도움을 주겠다며 지퍼가 열린 무거운 가방을 애써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와 급하게 가방 안에 있던 산문집 ‘자유로운 영혼의 노래를 부르며’를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전해주었다. 그렇게 그 학생은 끝까지 도움을 주며 2호선 순환선에 내 가방을 실어주고 떠났다. 고마운 마음이 스쳐 지났다. 이렇게 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준 그 마음과 행동에 감사했다.

2호선 순환선이 사당역을 향해 가고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난다. 사람이 앉을 좌석에 올려진 툭 터진 저 가방을 또 어떻게 사당역에서 내릴까를 머릿속에 되뇌며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우선 내리는 것이 우선이니 내 힘으로는 어려울 것 같고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 할 것 같아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 한 젊은 남자분이 있었다. 때마침 사당역 도착 전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그 남자분이 내릴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좌석에 놔둔 가방을 그대로 둔 채로 그분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니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나마 사당역에서 내린 곳은 에스칼레이터가 있어 다행이었다. 도움을 준 분에게 산문집 한 권을 챙겨드리려니 괜찮다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오가는 인파들 속에서 가방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머물렀다. 일단 밖에 나가면 캐리어를 찾아 옮겨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것도 그 나중의 일이다. 지금의 지하에서 지상을 오르는 저 짧은 거리까지의 이동이 중요한 것이다. ‘대처능력’의 순간이 필요한 때였다. 문득, 가방을 묶을 양말이 떠올랐다. 양말과 래깅스를 이용해 십자로 묶었다. 참으로 급한 상황에서의 대처법이 그럴싸하지 않은가.

이렇듯 우리의 삶에서 생각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던가. 일어난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일어난 일을 대처할 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또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과유불급의 사자성어처럼 삶에서나 인생에서도 과욕은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여행용 가방에 욕심을 내어 많은 물건을 넣은 이유였다.

하지만 또 그 난감하고 황당한 상황에서 하나를 배웠으니 감사한 하루였다. 특강을 마치고 학생 한 분이 여기저기 셀폰으로 검색을 해보더니 홈플러스가 가까운 곳에 있다고 안내해 주어 또 도움을 받았다.

병원 건강검진을 위해 움직여야 하니 강의를 마친 저녁은 병원과 가까운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건강검진을 마친 후 화곡동의 큰 언니 집으로 이동할 계획이고 아직 남은 일정은 캐리어의 도움을 계속 받아야 하는 까닭에 캐리어의 바퀴가 튼튼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홈플러스에서 물건을 고르다 제일 비싼 가격의 캐리어를 구매했다. 오래도록 나와 동행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며 캐리어 바퀴를 찬찬히 들여다 본다. 이렇듯 늘 함께 동행하는 가족이나 친구 등 삶에서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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