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소처럼 늙어라/ 유강희

나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아직은 늙음을 사랑할 순 없지만 언젠가 사랑하게 되리/ 하루하루가 다소곳하게 조금은 수줍은 영혼으로 늙기를 바라네/ 어느 날 쭈글쭈글한 주름 찾아오면 높은 산에 올라 채취한 나물처럼/ 그 속에 한없는 겸손과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하늘의 열매 같은 그런 따사로운 빛이 내 파리한/ 손바닥 한 귀퉁이에도 아주 조금은 남아 있길 바라네/ 언젠가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다 잠깐 들어가 본/ 오래된 정미소처럼 그렇게 늙어 가길 바라네/ 그 많은 곡식의 알갱이들 밥으로 고스란히 돌려주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식은 왕겨 몇 줌만으로 소리 없이 늙어 가는/ 그러고도 한 번도 진실로 후회해 본 적 없는/ 시냇물 흐르는 소리도 반짝, 들려주는 녹슨 양철지붕을/ 먼 산봉우리인 양 머리에 인 채 늙어 가는 시골 정미소처럼/ 나 또한 그렇게 잊힌 듯 안 잊은 듯 조용히 늙어 가길 바라네

- 웹진 《문장》 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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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간다는 사실보다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을 더 누추하게 한다. 늙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기력이 쇠하여져서 생산성이 떨어지는 거야 어쩌겠나. 물론 성취하고 소유하고 유지할 능력을 계속 요구하는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함에 따른 서운함은 있다. 누구나 쭈글쭈글하지 않고 반질반질하길 바라겠지만 어림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늙어 보이는 것 자체에 두려움을 가질 이유는 없다. 어쩌면 나이 들어 더 이상 호르몬의 작용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일지도 모른다. 늙는다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 일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분명한 핑계거리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늙는다는 것은 우리 몸이 자신의 의지대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각성케 한다.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몸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다. 죽음을 피해갈 수 없듯이 누구나 언젠가는 늙을 수밖에 없다. 그때 ‘하루하루가 다소곳하게 조금은 수줍은 영혼으로 늙기를 바라’는 마음가짐은 얼마나 갸륵한 인간의 모습인가. ‘높은 산에 올라 채취한 나물처럼’ ‘그 속에 한없는 겸손’을 읽는 것이야말로 늙음을 사랑하는 일이 아니랴.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영혼을 더 늙게 하고, 그 두려움은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게 하여 끊임없이 고통에 시달리게 만든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후보시절 한 지방신문에 실린 자신의 사진이 늙어 보이고 눈매가 사납다고 해서 캠프참모를 시켜 신문사에 앞으로 그 사진은 절대 쓰지 말라는 당부 전화를 해왔다. 아닌 게 아니라 같은 사람 같은 시간의 사진도 분위기와 느낌이 전혀 달리 보이는 경우는 예사로 있는 일이다. 사진의 이미지에 민감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디 사진뿐이랴. 얼마 전 최순실은 이름 갖고도 이미지 훼손이니 뭐니 그러지 않았던가. 그들에게 ‘오래된 시골정미소처럼 그렇게 늙어라’고 하면 시적 이해는 고사하고 아마 기겁을 할 것이다. 사진을 보면 늙어가는 제 모습이 역력하여 사진 찍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고도 한다. ‘시골 정미소처럼’ ‘잊힌 듯 안 잊은 듯 조용히 늙어 가’는 것도 그리 녹녹치만은 않은 일 같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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