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이겨낸 상처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배추 묶음이 놓인 들을 지난다. 바람은 차가움을 더하지만, 그래도 햇볕은 따스한 기온을 머금은 채 겨울나기 준비를 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다. 이제 집안을 정돈하고 본격적으로 월동 준비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부쩍 추워지는 날씨에 올해엔 얼마나 또 찬 바람이 몰아칠까. 서리 내린 뒤 붉은 피마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익어서 벌어지기를 기다리던 목화송이마저 정지된 채 붙어있는 텃밭이 눈에 들어온다. 바스락거리는 국화꽃 잎의 마른 소리를 들으며 흙을 밟아본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 큰일만은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동안 잠깐 몰아닥친 추위에 모든 결실이 얼어붙었으면 어쩌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다가가 보니 속이 꽉 찬 배추가 “나, 여기 있소~!”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내며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막내 제부가 봄이 시작되었을 때 좋은 거름을 듬뿍 넣어서 모종해 주었던 덕분일까. 한여름의 땡볕에도 가을 찬바람에도 저렇게 꿋꿋하게 자라나고 속이 차서 겨울 식구들의 김장을 위해 손길을 기다리고 있나 보나.

날씨 따뜻한 주말 어느 날, 식구들과 친척들 모여 하나씩 뽑고 씻고 절여서 갖은양념을 버무려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지도록 김치를 담가 보리라. 나의 어머니와 동생들, 제부까지 다 모여 앉아서 시끌벅적하게 김장을 하던 때가 그립다. 어머니의 손맛은 아무리 닮으려 해도 흉내조차 낼 수 없으니, 그저 그때 그 맛, 그 분위기만을 떠올리며 마음으로 위안을 받을 수밖에 도리가 있겠는가. 김장을 마칠 즈음 돼지고기 수육을 삶아서 양념 갓 섞은 김장김치를 쭉쭉 찢어서 서로의 입에 넣어주던 그때가 정말 그리워진다. 입은 그때의 맛을 기억하고 있었던 듯 벌써 침이 고여 온다. 어머니가 안 계시는 지금에는 내가 그 자리에 대신 앉아서 그날의 분위기를 연출해야 하지 않으랴.

김장할 날을 뽑아보려고 휴대폰 일정을 열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통화 버튼을 누르니 울먹이는 여동생의 목소리다. 놀라서 자초지종을 물으니 취미생활로 목공을 배우던 제부가 늦은 시간에 작품을 완성하려고 전기톱을 쓰는 순간, 칼날이 엄지손가락을 지나갔다는 것이 아닌가. 전화 목소리로도 상황이 심각함이 느껴져 얼른 병원으로 가자고 하였다. 신발도 끌다시피 하여 운전대에 앉아 응급실로 달려갔다. 몸무게가 100킬로가 넘는 거구에다 장신인 제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있다. 무서웠던 그 찰나. 아픔에 못 이겨 어지럼증이 찾아와 한동안 바닥에 누워 있다가 차에 실려 왔다는 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픔이 느껴져 온몸에 소름이 돋아왔다.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이니 잘 치료되어 더는 후유증이 생기지 않도록 애쓰는 수밖에. 종합병원 응급 대기실에 앉아서 기다리다 보니 갖가지 사고로 혼비백산 찾아오는 이들이 밤을 새워 몰려든다. 수술하고 나서 운동을 하는 이들은 각자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문병객을 맞는다. 벌초하러 형제가 함께 산소에 갔다가 시끄러운 예초기 소리 탓에 옆에 서 있는 형을 못 보고 예초기 날을 휘둘러 그만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어 수술하였다는 분, 손목이 반쯤 깊이 밤새도록 연결 수술을 하고서 몇 달째 치료 중이라는 젊은이, 모두 피범벅이 되었던 이들이 이제는 옛날 추억을 되새기듯 담담한 어조로 그날의 사연을 지인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다친 제부도 얼른 수술이 잘되어 얼른 저렇게 지난 일을 웃음 띤 얼굴로 이야기 할 수 있기를 바랄 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처지가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응급 수술로 인해 밤엔 진통제로 버티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밤 동안 그야말로 뼛속까지 느껴질 그 고통을 어찌 감당할까. 영상 사진으로 본 엄지손가락 뼈는 세차게 돌아가는 전기 톱날에 깊이 파인 동굴처럼 되어 끝만 겨우 붙어 있고, 살은 휴지 조각처럼 찢어져 벌어져 있었으니 그 아픔이 어땠으랴. 혼절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 정도의 상처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날이 밝아 수술하는 그를 수술실로 들여보내며 간절히 기도한다. 이 겨울을 무사히 잘 넘기게 해 달라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찬 기운에 얼지 않고 아픔으로 고통 받지 않고 상처도 말끔하게 잘 나아서 새살이 차올라 원래의 기능을 되찾게 해주기를.

이 한 소절의 글이 위로될까. “내가 한마음의 상처를 잊게 할 수 있다면//중략// 내가 한 생명의 고통을 덜게 하고 그 번뇌를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혹여 내가 죽어가는 한 마리의 물새를 다시 둥지로 돌아가 살 수 있게 한다면/ 내 삶은 실로 헛되지 않으리.” 에밀리 디킨슨처럼 만일 내가 한마음의 상처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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