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금오산 약사암

▲ 금오산은 불교의 성지이다. 곳곳에 신라와 고려시대 절터가 남아 있다. 산 정상에는 천년고찰 약사암에 단풍이 곱게 내려앉았다.
▲ 금오산은 불교의 성지이다. 곳곳에 신라와 고려시대 절터가 남아 있다. 산 정상에는 천년고찰 약사암에 단풍이 곱게 내려앉았다.
남숭산이라 불린 금오산은 통일신라 이후 조선이 불교를 억압하기 전까지 수많은 절이 곳곳에 들어서며 불교의 꽃을 피웠다.

금오산은 동쪽에서 바라다보면 큰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이다. 와불 형태가 도드라져 보인다.

평지지형에는 제법 큰 규모의 절이 지어지고, 산록에는 그 지형에 맞게 아담한 절이 들어섰다. 또 깎아지른 절벽 끝이나 커다란 바위를 등지고 자리한 절들도 생겨났다.

신령한 영산이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1천여m 가까운 산 정상에도 절은 자리했다. 금오산 정상에는 약사전과 보봉사, 동양사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며 보봉사와 동양사는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고 신라시대 창건했다는 약사전만 약사암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불교의 성지 금오산

시절을 깜빡한 추위가 살을 에이게 하는 날. 금오산(976.5m)에는 아침부터 눈발이 날렸다. 평일 때 이른 강추위에도 많은 등산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금오산의 명물 대혜폭포에는 많은 등산객이 몰려 사진찍기에 바쁘다.

▲ 금오산 대혜폭포.
▲ 금오산 대혜폭포.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선굴이 있다. 고려 때 승려였던 도선국사가 수도했다는 곳인데 지금도 찾는 이가 많다.

도선굴 아래에 대혈사라든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일선지에는 ‘대혈사는 금오산 북쪽에 있다. 임진란 후에 중창하였고, 서원에 속한다’고 적고 있다. 또 ‘야은 선생이 항상 대혈사 인근 누각 위에 거치하였고, 금산에서 대나무를 손수 옮겨 여기에 심었다. 고을 사람들이 대나무 베는 것을 금하여, 지금도 오히려 짙푸르고 무성한데, 이름을 야은죽이라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된 야은 길재의 시가 전한다.

대나무 빛은 봄가을로 절의를 굳게 하고(竹色春秋堅節義)/ 흐르는 시내물은 밤낮으로 탐욕을 씻어주네(溪流日夜洗貪婪)/ 마음의 근원이 깨끗하여 티끌이 없으니(心源瑩淨無塵滓)/ 이로써 바야흐로 도리의 참맛을 알 수 있다네(從此方知道味甘)

오래된 절과 영남 성리학의 문을 연 유학자의 만남이 어색하지 않다.

금오산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고 하지만 이는 그저 멀리서 바라다볼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만큼 녹록지 않은 산이라는 이야기다.

산세가 험하고 경사가 급해 오래 산을 탄 등산객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산이다.

그래서 일부 구간의 이름은 일명 ‘할딱고개’이기도 하다. 대혜폭포에서 수백m 정도 거리인데 데크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지만 경사가 급하긴 마찬가지다.

또 이를 통과해도 8부 능선에 있는 철탑까지 차오르는 숨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경사가 이어진다.

철탑 인근은 깎아지른 절벽이 있어 안전시설을 설치했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할 정도다.

철탑을 지나면 평지가 이어진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다시 개축했다는 금오산성의 내성을 지날 때까지는 평지다.

하지만 정상을 500여m 남겨두고 다시 급경사가 이어진다.

할딱고개와 철탑까지는 그래도 잠시 쉬면서 뒤돌아서 멀리 구미시내와 낙동강을 조망하는 재미라도 있었지만 정상을 앞둔 이곳은 주변을 둘러봐도 참나무뿐이다. 눈을 시원하게 하는 그 무엇도 없다. 잠깐이라도 긴장을 풀면 사고가 날 수 있는 곳이 금오산이다.

▲ 금오산 정상 현월봉.
▲ 금오산 정상 현월봉.
정상 부근 작은 돌을 쌓아올려 만든 탑이 멀리 보인다. 한 노인이 사연을 담아 탑을 쌓았다는 이곳은 보봉, 백운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에 보봉사가 있었다고 한다.

금오산 정상은 현월봉(976.5m)이다. 초승달이 걸려 있는 듯한 모습에서 따 온 이름이라고 한다. 각오는 했지만 추위가 만만찮다. 산을 오르며 느끼지 못했던 칼바람에 등산객들이 우왕좌왕한다.

▲ 금오산 약사암 일주문.
▲ 금오산 약사암 일주문.
◆성속의 경계에 있는 약사암

현월봉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약사봉이다. 그 아래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약사암이 자리를 하고 있다.

정상에서 내려와 동쪽을 향하면 ‘동국제일문’이라고 쓴 약사암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은 앞으로의 공간이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하는 상징문이다. 일주문 너머는 부처님의 영역인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약사암 일주문을 지나니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길 양옆으로 막아선 엄청나게 큰 바위틈 사이로 눈 부신 햇살이 쏟아진다. 몽환적이라고 해야 할까.

▲ 약사암 일주문을 지난 약사암으로 가는 길.
▲ 약사암 일주문을 지난 약사암으로 가는 길.
내가 서 있는 쪽은 음지이고, 겨울이고, 어둠이고, 세속적인 데 비해 바위 아래로 드러난 모습은 양지이고, 여름이고, 광명이고 성스럽다.

경북 8경으로 꼽히는 금오산에서도 가장 절경인 곳, 그곳에 약사암이 있다.

인공으로 만든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려서면서 어떻게 이런 곳에 절을 지을 수 있었을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작은 전각 뒤로 마치 병풍처럼 둘러친 기암절벽, 약사봉은 그 규모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인 약사암은 신라시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초년에 천하 비경을 찾아 이 바위 아래에서 참선할 때 하늘의 선녀가 하루 한 끼의 주먹밥을 내려주어 하루하루 요기를 했고 약사여래가 내려와 시중을 들어줘 사바와 번뇌에서 벗어나 고승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약사암에 대한 기록은 조선 중기 학자며 선산부사를 지낸 최현의 일선지와 정조 23년(1799년)에 간행된 범우고에도 남아있다.

일선지에 ‘약사전은 약사봉 아래에 있다. 돌 벼랑이 높이 솟은 곳에 바위틈을 타고 작은 암자를 지었다. 나무다리를 건너 절벽을 붙잡고 들어가는데 그 아래가 만 길이나 아득히 깊어서 내려 볼 수가 없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종 때 편찬된 영남진지는 ‘법당은 8칸으로 성내 3리에 있다’고 적었다. 하지만 당시의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

▲ 금오산 약사암 본당인 약사전. 엄청난 크기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있다. 약사전 안에는 금색을 입힌 석조여래좌상(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62호)이 모셔져 있다.
▲ 금오산 약사암 본당인 약사전. 엄청난 크기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있다. 약사전 안에는 금색을 입힌 석조여래좌상(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62호)이 모셔져 있다.
◆삼형제 불상 중 하나 이곳에

계단을 내려서면 넓은 마당이 나오는데 오른편에 삼성각이, 왼편에 본당인 약사전이 있다. 이는 모두 근세에 조성한 것이다.

마당이라고 하지만 그 아래에 종무소 등 다른 건물이 이 마당을 지붕으로 삼고 있다.

약사전은 1985년에 중수한 법당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약사전에는 신라말이나 고려 초 사이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좌상(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62호)이 있다.

약사전 옆에 약사전 석조여래좌상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석조여래좌상은 약사전에 모신 불상이며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을 두텁게 입혔으나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새로 금을 입히기 전인 1960년대 사진을 통해 원만한 얼굴모습에 완전한 형태의 석가여래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우상학의 약사암 중수기(1935년)에는 본래 지리산에 있던 석불 3구, 삼형제불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 중 1구는 김천 직지사에 다른 1구는 김천 증산면 수도암에 봉안했다고 한다.

보물 제296호인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의 설명문에 ‘수도암 석불좌상은 금오산 약사암에 있는 석불과 김천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보물 제319호)과 함께 3형제라고 하고 그 중 한 석불이 하품하면 다른 두 석불이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유래를 밝히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약사전 중수기에 전한다. 석불을 모시게 된 배경과 약사전을 중수하게 된 이유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인 박유술이 불상을 만들고 금오산에 와서 석봉대 아래 쉬고 있을 때 홀연히 불상이 땅에 정좌해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곳에 암자를 세웠다고 하며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우상학이 중수했다고 한다.

약사전 석조여래좌상 옆으로는 일광, 월광보살이 협시돼 있으며 후불탱, 신중탱, 독성탱 등의 불화가 걸려 있다.



▲ 약사암에서 내려다본 전경.
▲ 약사암에서 내려다본 전경.
◆만길 낭떠러지, 어마어마한 약사봉 절벽을 붙잡고선 약사암

약사전을 뒤로하고 남쪽을 바라보면 멀리 낙동강과 칠곡이 훤하게 보인다.

약사전 바로 아래는 최현이 일선지에서 지적했듯이 천길 아니 만길 낭떠러지다. 그 낭떠러지 너머로 종각이 있는데 출렁다리에 의지해 건너야 한다. 지금은 등산객들의 안전을 우려해 출렁다리의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또 약사전 아래로는 좁은 철 구조물로 만든 다리가 하나 있는데 이는 동쪽 암벽에서 용출하는 약수를 받기 위해 만든 다리다. 이 약수가 나온다는 구멍에서 쌀알이 하나씩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최근에는 이곳의 주지인 대혜스님이 국내 최소 크기의 마애불을 발견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대혜스님은 약사암에서 멀지 않은 금오산 마애보살입상(보물 제490호) 인근에서 부처님이 좌선하는 모습을 새긴 손바닥만 한 마애불을 발견했다.

그는 “지난 추석쯤 우연히 바위 위에 새겨진 부처님을 발견했는데 두광과 신광을 표현한 방법이나 바위에 새겨진 글들이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혜스님은 이 마애불을 보호하는 한편 연구를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

약사암 난간 끝에서 내려다보는 공간의 아름다움은 마침내 낙동강과 그 평야를 끌어들여 눈앞에 펼쳐지게 하고 있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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