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위험, 왜 무시하나

박운석

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델리리움(Delirium)’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벨기에 맥주가 있다. 병 라벨에 귀엽게 보이는 분홍코끼리가 그려져 있다. 하지만 보기와 달리 단어의 뜻은 정반대이다. 델리리움은 섬망이라는 뜻으로 심한 과다행동과 생생한 환각, 초조함과 떨림 등이 자주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한다. 4가지 델리리움 맥주 중 하나인 ‘델리리움 트레멘스(Tremens)’는 ‘진전섬망’이란 뜻으로 알코올 중독자가 알코올 섭취를 중단했을 때 나타나는 손떨림, 환각 등의 증상을 보이는 의학용어다. 이 때 나타나는 환각 중의 하나가 분홍 코끼리라고 해서 이 맥주의 상징이 됐다. 물론 이름값을 할 만큼 알코올 도수도 높다.

코끼리는 경제현상을 설명할 때도 등장한다. 하얀 코끼리이다. 옛날 동남아시아에서는 하얀 코끼리를 영적인 존재로 신성시했다. 당시의 왕들은 아니꼬운 신하에게 하얀 코끼리를 하사하곤 했다. 그러나 막상 왕이 선물한 신성한 동물에게는 일도 시키지 못해 쓸모는 없으면서 사료비 등 유지비는 엄청 많이 들었다. 이처럼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고도 효과가 별로 없어서 처치 곤란한 프로젝트를 ‘하얀 코끼리(White elephant)’라고 한다. 주로 국제스포츠경기를 위해 사후 운영방안을 생각하지 않고 막대한 재원을 투입한 시설이나 경기장을 말할 때 사용하는 용어다.

경제현상 또는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다른 동물들도 등장한다. 검은 백조를 뜻하는 ‘블랙 스완(Black Swan)’도 그 중 하나다. 블랙 스완은 17세기말 서양인들이 호주 대륙에 발을 디딘 이후에야 발견됐다. 그때까지 백조는 당연히 흰색이었다. 이같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실제 일어날 경우를 표현하는 말이 블랙 스완이다. 월가 증권분석가 나심 탈레브가 월가의 위기를 경고한 그의 책 ‘블랙 스완(Black Swan)’에서 주장했다. 블랙 스완은 발생 가능성은 아주 낮지만 한번 발생하면 큰 충격이 가해진다. 2008년 경제위기, 9.11 테러 등이 대표적인 블랙 스완이다.

블랙 스완이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이 일어나는 경우라면 ‘회색 코뿔소’는 반대 개념이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너무 멀리 있는 위험으로 느껴 아무런 대책없이 시간을 보내는 상황을 비유한다. 코뿔소는 몸집이 커서 멀리 있어도 쉽게 눈에 띄는 바람에 말 그대로 빤히 보이는 위험이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가까이 달려오면 두려움이 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위기라고 진단하는 한국의 현 상황과 관련해 위의 동물들이 회자되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하얀 코끼리도, 블랙 스완도, 회색 코뿔소도 배회하고 있다. 어쩌면 델리리움 상태에 빠져 분홍코끼리마저 보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한국의 경제상황은 어떤가. 예측 불가능한 위험인 ‘블랙 스완’은 아닌 것 같다. 이미 국내외 많은 경제전문가들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IMF 등에서 한국의 경제위기에 대해 경고를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큰 위험이 보이는데도 무시하는 ‘회색 코뿔소’에 가깝다. 정부조차 지금이 경제위기라는 인식에는 동조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 멀리 회색코뿔소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자영업자들이 쓰러지며 건물마다 임대 현수막이 나붙고, 수출은 11개월 연속 감소세이고, 경제성장률은 2%도 불투명한 상황이며 소비와 투자마저 위축되고 있다. 급격하게 진행되는 고령화와 저출산도 빤히 보이는 회색코뿔소다. 아직은 평온해보이지만 잠재된 위험 때문에 언제 회색코뿔소가 돌진해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경제는 정치이슈에 철저히 가려지고 있다. 지금처럼 위기를 보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한다면 어느 순간 큰 몸집의 회색코끼리가 우리를 들이받을지 알 수 없다.

‘회색 코뿔소가 온다’의 저자 미셸 부커의 경고가 의미심장하다. “예측이 불가능하면서 어느 순간 나타나면 엄청 큰 타격을 주는 블랙 스완 보다는 오히려 눈에 보이지만 무시해버리는 위험인 회색 코뿔소를 더 걱정해야 한다”

서민들은 피부로 직접 느끼고 있는 이 경고를 정치권에서 무시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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