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가르닉 효과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입동이 지났다. 겨울 기운이 느껴지는 바람 속에서도 화살나무 잎새들은 빨갛게 볼을 물들이며 열매를 영글게 한다. 한기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있는 그들의 의연한 자태가 참으로 대견하다.

차에 올라 히터를 한껏 틀어 온도를 높여본다. 몸과 마음이 자꾸만 떨린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영면 소식을 듣고서 너무나 가슴 아팠다. 조금이라도 더 적극적으로 찾아볼 걸. 친구도 하늘나라에서 얼마나 안타까워할까.

성악하는 친구가 주택을 개조하여 예쁜 카페를 내었다. 여고 동기들이 모였다. 그곳에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작년 겨울 이후 여러 차례 연락해도 받지 않던 친구가 올해 봄 담도암으로 눈을 감았다는 것이 아닌가. 평생 주말 부부로 살면서 아침 일찍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환자들과 부대끼며 조금의 여유를 갖지도 못하던 그녀였다. 그렇게 아이들을 키우고 나서 이제 조금 시간이 난다면서 연락하더니. 소식이 궁금하여 봄부터 여러 차례 전화해도 받지 않기에 무슨 일이 있는가. 급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혹여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부재중 통화에 답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여러 생각을 하면서도 그저 그녀가 소식을 전해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결국엔 영영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어 버리다니.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한기가 들기 시작하였다. 친구들과의 자리를 피해 도망치듯 일어섰다. 후회가 밀려와 가슴을 쥐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그녀와의 대화창엔 “조용할 때 우리 꼭 만나자.”였었는데.

‘자이가르닉 효과’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다. 하고자 했던 그녀와의 만남이 약속만 하고 완결되지 않았으니 그 긴장이나 불편한 마음은 오래 지속되어 잔상이 되어 내내 오래오래 남아 있지 않겠는가.

1927년 오스트리아 빈의 한 카페. 어떤 여성이 요리를 나르는 웨이터를 지켜보고 있다. 이 웨이터, 종이에 적는 것도 아닌데 여러 손님의 주문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서빙하고 있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하나도 잊지 않는 웨이터를 신기하게 여긴 여성이 계산을 마친 뒤 그 웨이터에게 누가 어떤 음식을 주문했는지 다시 말해 볼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웨이터는 크게 당황하며 계산이 끝난 마당에 그걸 왜 기억하냐고 되물었다. 그때 그 자리에서 놀라운 상황을 목격한 여성이 바로 러시아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닉(Bluma Zeigarnik)이었다. 자이가르닉은 이 경험에서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려 실험을 하나 고안했다. 그녀는 실험 참가자를 A와 B의 두 그룹으로 나누고 그들에게 각각 간단한 과제를 내주었다. 시 쓰기, 규칙에 따라 구슬 꿰기, 연산하기 등 15~22개의 과제로 이를 수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체로 비슷했다.

실험의 핵심은 A그룹이 과제를 수행할 때는 아무런 방해를 하지 않고, B그룹은 도중에 중단시키거나, 하던 일을 일단 놔두고 다른 과제로 넘어가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과제를 마친 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해야 했을 때 B그룹의 실험 참가자들이 A그룹보다 무려 두 배 정도 더 많이 기억을 해냈다. 반면, 그들이 기억해 낸 과제 중 68%는 중간에 그만둔 과제였고, 완수한 과제는 고작 32%밖에 기억해 내지 못했다. 마치 카페의 웨이터가 계산을 끝낸 더는 볼일 없는 손님의 주문은 더 이상 기억하지 못 했듯이 말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목표를 이루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바로 이 자이가르닉 효과가 아닐까 싶다. 자이가르닉은 이처럼 끝마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우리가 심리적으로 긴장하게 되고 줄곧 남아 있는 일에 미련을 두기 때문에 더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뇌리에 남아서 기억하게 된다. 이런 심리 현상을 그녀의 이름을 따서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부른다. 하던 일을 다 완성하거나 목표를 달성하면 긴장은 풀리고, 기억에서는 쉽게 잊힌다. 하지만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일, 예를 들면 이루지 못한 첫사랑. 시험에서 못 푼 문제, 클라이맥스일 때 끝나 버린 드라마, 작심삼일이 되어 가고 있는 새해 새 아침에 세웠던 계획들, 이런 것들은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곤 한다. 이런 아쉽고 찜찜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행동하도록 부추겨서 다시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작가 헤밍웨이도 바로 이 효과를 이용하여 글을 써서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고 하지 않던가. 일단 시작한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한 마음을 한번 맛본다면 다음번 목표는 이것의 도움 없이도 잘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자이가르닉 효과로 내내 마음에 남을 것이니, 이 겨울엔 후회 남지 않도록 잘 살아보는 것이 어떨까.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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