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애/ 이수익

때로 사랑은 흘낏/ 곁눈질도 하고 싶지/ 남몰래 외도도 즐기고 싶지/ 어찌 그리 평생 붙박이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나// 마주 서 있음만으로도/ 그윽이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저리 마음 들뜨고 온몸 달아올라/ 절로 열매 맺는/ 나무여, 나무여, 은행나무여// 가을부터 내년 봄 올 때까지/ 추운 겨울 내내/ 서로 눈 감고 돌아서 있을 동안/ 보고픈 마음일랑 어찌 하느냐고/ 네 노란 연애편지 같은 잎사귀들만/ 마구 뿌려대는/ 아, 지금은 가을이다. 그래, 네 눈물이다.

- 시집 『꽃나무 아래의 키스』(천년의 시작,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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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붙박이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오래 전 나훈아의 말마따나 인생을 두 번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번은 아무따나 연애도 실컷 하면서 살아보고, 또 한 번은 조심조심 신중하게 평생의 반려를 만나 사랑하겠는데 한 번뿐인 생이기에 양수 겹장이 쉽지 않은 것이다. 마주 서서 ‘그윽이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절로 열매 맺는 은행나무와 같은 사랑이 가능하다면야 통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사랑이 구가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카사노바 식 둘러대기라든지 ‘사랑에서 책임과 의무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스탕달의 연애론마저 낡아빠져 폐기될 게 뻔하다.

오래전 제인 폰다 주연의 ‘바바렐라’란 공상과학영화가 있었다. 성교의 방식도 진화를 거듭하여 마주보고 두 손바닥을 맞대는 것만으로 정신적, 육체적 합일감에 이르는 미래형 연애이다. 41세기에는 오로지 감정의 일치만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고 서로 주파수를 맞춘 채 손을 맞대고 덜덜덜 떨면 사랑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하고나 가능한 건 아니고 정신적 유대와 사랑의 진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이 들수록 그처럼 그윽한 사랑이 필요한 건 왜일까. 전통적 방식의 사랑에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이유도 없지 않겠으나 ‘그윽이 바라보는 눈길’같은 감정의 호사에 더 목이 말라서가 아닐까.

정말 그저 바라만 보고 손길만 스쳐도 충만한 사랑이 왔으면 좋겠다. 군데군데 은행알이 보도위에서 구린내를 풍기더니만 이젠 은행잎이 완전 짙은 노랑으로 물들어 광채가 눈부시다. ‘노란 연애편지 같은 잎사귀들’ 직설법 추파처럼 마구 뿌려대고 있다. 연인이 있건 없건 이럴 때 방구석에만 처박혀있는 것은 반칙이고 죄악이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도심에서도 은행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암수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심어놓은 은행나무가 가로수로서는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많다. 사실 고약한 냄새보다는 인도나 도로에 떨어진 열매가 사람 발길과 차량에 짓이겨지고 들러붙어 거리를 지저분하게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다른 수종으로 이식하든가 은행이 안 열리는 수나무로 바꿔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요즘은 수나무로 교체하는 지역도 더러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병충해와 공해에 강하고 도시에서 이보다 계절감을 느끼게 해주는 나무도 없기에 아예 수종을 바꾸는 것은 예산낭비이기도 하고 온당치 않아 보인다. 공공근로를 확대해 낙과 전에 수거하는 것도 방법이다.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남겨진 이 가을날들 어떻게 흔들리며 추슬러야할지 걱정이다. ‘네 눈물’을 어찌 다 거두어야할지 난감하다. 은행나무 좋은 길을 찾아 걸으면서 ‘흘낏 곁눈질도’ 해봐야겠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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