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선 류현서



넓은 평지에 능들이 즐비하게 둘러앉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둥그런 산봉우리를 담아와 옹기종기 엎어놓은 듯하다. 널찍한 대릉원을 돌아보며 과거로 빨려 들어간다. 천마총 앞에 섰다.

시간의 저편을 고요히 더듬어 본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서원과 왕릉이 있다. 서원은 유교의 뜻을 따라 옛 성현을 받드는 장소다. 사회의 인재 양성과 미풍양속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 서원이다. 그렇다면 고분은 무엇인가. 능을 거닐면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고분은 나에게 답을 주기는커녕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모든 사람은 생사를 거친다. 죽음은 누구나 다다를 수밖에 없는 귀결이다. 흐르는 시간과 함께 늙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동서고금을 통해 변함없는 진실이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경험을 쌓고 쌓아 저 봉분만큼 높다는 걸까. 신라고분은 평생 겪은 일들을 뭉쳐서 이렇게 높게 쌓아 올려 준 것일까. 아니면 이승에서 못다 한 일이 많이 남아 있어 사후세계에 가서 마무리하여 차곡차곡 저장시키라는 뜻에서, 넓은 공간을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천마총 안으로 들어섰다. 목관을 비롯하여 발굴 당시의 현장 그대로 진열해 놓았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발굴된 무덤에서 피장자가 금관을 머리에 쓰고 금띠를 허리에 두른 채로 출토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관 밖에서는 금제 꾸미기와, 금제 족집게, 자루 달린 솥, 다리미, 청동 용기류, 굽다리접시, 토기, 유리 배, 굽은 옥, 등 껴묻거리가 다양하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권력을 누리는 신라인, 여기 고분에서 죽은 자의 권력을 반추해본다. 천마와 금관과 수많은 껴묻거리에서 알 수 있다. 황금으로 만든 다양한 생활용품들은 아름다운 문화의 반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땅이 넓지 않고 작은 나라이지만, 겁 없이 화려했고 통 큰 문명국가였음을 직감한다.

한발 한발 고분 깊숙이 들어갈수록 어둠이 짙게 깔렸다. 장님 냇물 건너가듯 한참을 더듬거리며 조금씩 안으로 들어갔다. 두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집중하고 살폈다. 섬광이 번뜩했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장니를 매단 천마가 꼬리를 세우고 하늘을 향해 달리고 있다.

장니는 말 탄 사람의 옷에 흙이나 물이 튀지 않게 안장 양쪽에 달아 사용하는 도구이다.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친 뒤, 그 위에 다시 고운 수피로 누벼 가장자리엔 가죽을 대었다. 볼수록 화려한 장니가 천년이 훌쩍 지나는 동안에도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흙 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자작나무는 하늘을 향해 끝없이 쭉쭉 뻗어 자라는 게 특징이다. 다른 나무와 달리 몸체와 잎이 은색이다. 자작나무에 바람이 스칠 때면 하얀 이파리가 마치 은으로 지은 옷같이 반짝거린다. 은 옷을 입은 하늘나라 신선들이 나풀나풀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나무와 달리 영생을 기원하는 나무로 신성시 여겨왔을 테다. 그러했기에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천마도를 그린 것이리라. 옛적 선조들이 누구를 위해 고운 수피로 장니를 만들었을까. 필경 인간계에서 삶을 마치고 다다른 사후세계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을 것 같다.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 한다. 칸트는 “죽음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다.”고 말했다. 죽음은 무거운 육신을 버리고, 가벼운 영혼으로 자유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겐가. 인간이 유한한 이승에서 무한한 세상으로 뛰어드는 게 무덤으로 들어가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세계를 꿈꾸기 위해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닐는지.

천마총에 들어오니 어디쯤이 하늘이고 어디쯤이 지상인지 헷갈린다. 발 디딘 곳이 저승인지 이승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장자는‘우물의 물은 바다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내다봤다. 어쩌면 무덤은 지하로 내려가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육체는 땅에 묻히면 흙이 되었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지만, 정신세계는 변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의미와 같다.

죽어야 천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걸까. 인간의 혼이 저승에 도착하면 천마는 즉시 하늘로 실어 나르는 수행을 맡았을 것이다. 공중으로 향해 뛰는 모습이 엄중하면서도 날렵하다. 입으로 더운 입김을 내뿜으며 하얀 털이 바람에 휘날린다. 고분 속에서 말이 하늘로 달리고 있을 줄이야. 흰 말은 사람의 영혼을 싣고 깊은 지하에서 높은 하늘로 오고 갔으리라. 높고 낮은 산을 넘고 여러 개의 내 (川)를 건너야 하지 않았을까. 그때 말발굽에서 흙탕물이 튀어 올라 옷이 더럽혀질까 봐 장니를 달았던 게다. 오랜 시간을 건너왔건만 희어서 너무 희어서 눈이 부신 천마도. 목화솜같이 희고 때가 묻지 않은 것은 장니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천마가 사후세계의 긴요한 교통수단이라면, 이승에서 없어서는 안 될 생활 수단이 자동차다. 천마가 저승의 영혼을 실어 나른다면, 자동차는 이승의 육신을 태워 다닌다. 천마의 장니가 하얀 나무수피로 만든 것이라면,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하얀 유리로 되어있다. 수피로 만든 장니나 유리로 된 장니나 흙탕물을 튀지 않게 막아준다.

자동차가 없던 때에 말(馬)은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어떤 동물이나 짐승 중에서도 흰색을 지닌 동물을 더욱 신성시 여겨왔다. 전쟁을 치를 때도 날쌘 백마를 최상의 무기로 삼았다. 일상생활에서조차 흰말은 풍요와 행운을 몰고 오는 상징물로 꼽기도 했다. 요즘 사람들이 화이트카를 가장 선호하는 것과 같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여러 색의 자동차 중에서 흰색이 가장 많다. 흰색의 차는 재물을 상징한다. 그래서 속담에도 뜻밖에 좋은 일이 생기면, “백말 타고 장가드는 행운을 얻었네”라고 한다.

과거를 모르는 백성은 미래도 없다고 한다. 역사를 논하는 사람은 인간을 세계의 시간 흐름 속에서 설명하고, 철학인은 인간과 역경을 세계의 시공간적인 무시대성으로 말한다. 천마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 놓은 게 아니겠는가. 지구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시대를 뛰어넘은 천마도. 시간과 공간을 망라한 신라의 문화가 우리의 삶 속에 고요히 흐르고 있다.

고분에서 나와 높고 둥근 능을 바라본다. 고요도 힘겨워 차갑게 가라앉는 듯하다. 품이 너른 능들이 봄에는 연옥이불, 여름에는 푸른 비단이불을 덮는다. 가을에는 황금이불, 겨울에는 은이불을, 자연이 철철이 갈아주는 이불을 덮고 잠에 취해 있다.

여느 왕릉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무인석과 문인석이 천마총에는 없다. 곰곰이 생각에 젖었다. 천마총은 저승에 도착하는 즉시 천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굳이 무인석을 세울 필요가 없었던 거다. 만약에 무인석과 문인석을 좌우로 세웠다면 장니가 출토되었을까.

엄전한 대릉원이 후세에게 지난 역사를 되새기게 만든다. 긴 역사에 외부세력으로부터 이런저런 수모를 당해도, 마른버짐이 핀 배롱나무가 능을 지켜온 산 증인이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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