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선 김춘기



낭산 서쪽에 위치한 능지탑을 찾았다. 낭산은 경주국립박물관에서 울산 방향으로 2km 떨어진 곳에 있는 104m 높이의 나지막한 야산이다. 신유림이라 불리기도 한 신령스러운 성산으로 정상에는 선덕여왕릉이 있고 남쪽은 사천왕사지가 있다. 이 탑에서 문무왕의 시신이 화장된 것으로 추정한다.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린 4각모양의 2층탑으로 여느 탑과는 달라서 얼른 탑이라고 납득하기에는 색다른 모습이다. 기단을 복원하고 상부를 쌓았는데 사용하고 남은 연화석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면 5층탑이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탑 뒤에 성격이 규명되지 않는 토단이 있다. 혹시 토단 위에 장작을 쌓고 그 위에 유해를 얻어 태웠을까? 그 연기는 용의 형상으로 동해로 날아간 것은 아닐까? 거슬러 신라를 더듬어 보니 나라를 걱정하고 지키려는 왕의 마음이 시리고 아프다. 쉽게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아 탑돌이를 하면서 왕을 찾는다.

문무왕은 신라 30대 왕으로 아버지 김춘추의 뜻을 이어 삼국통일을 꿈꾼다. 통일을 이룬 후에도 이 땅을 차지하려는 야욕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싸움을 걸어오는 당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고 물리쳐서 진정한 삼국통일을 이룩한다. 그 후 왕은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는 뜻을 담아 사천왕사를 지어 호국사찰로 자리매김하고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전쟁으로 피폐한 농업생산을 회복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왕은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인도식에 따라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고 하였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해서 유해를 동해의 바위에 장사지냈다. 최초의 수중 무덤 대왕암이 그것이다.

신라왕들은 대부분 사후에도 편히 살기 위해 많은 부장품과 함께 묻혔다. 경주는 고분의 도시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도심에 산처럼 높이 만들어진 능(총)들이 널려있다. 대부분 신라왕과 왕비의 능이다. 그들은 되도록 많은 부장품을 가져가려고 무덤의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돌무지 덧널무덤은 껴묻거리(함께 묻을 도구) 상자를 넣을 방을 나무덧널로 설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고 다시 흙으로 덮어 만들었다. 많은 물건을 넣고 물건을 도난당하지 않기 위한 양식이다. 천마총에서 출토되어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은 금관, 장신구, 무기, 마(馬)구, 그릇 등 엄청난 양이다. 심지어 어떤 마립간(왕)은 심부름할 소녀까지 데리고 들어갔다. 살아서 누린 권력과 재력을 사후까지 누리겠다는 끝없는 욕심이 빚은 제도이다. 사(死)자의 권력과 지위에 따라, 때로는 산자의 권력에 따라 껴묻는 부장품의 양이 늘어났으니 사후에도 지위를 누리며 땅속에서 죽음을 살고 있다. 정작 부장품들은 주검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을 뿐 사용된 흔적은 없다.

불교에서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고 한다. 빈 몸으로 떠남이 마땅하다. 이승의 것은 산자의 몫, 떠나는 이들이 행여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 법정스님은 이승의 삶에서조차 무소유를 설파했다. 불교를 국교로 받들던 신라의 왕이라면 그 정도의 철학은 지녔어야 왕이다. 산처럼 높이 쌓은 능 안에서 이승의 도구로 저승의 삶을 살기 위해 채움은 불교의 교리도 아니고 지도자의 영도력도 아니다. 이승의 도구가 저승에서도 맞겠는가? 모두가 비움의 미학을 알지 못한 인간의 짧은 생각과 욕심이 만들어낸 관습이다.

문무왕은 오로지 이 땅만을 생각했다. 그의 삶의 철학은 죽음에까지 이어진다. 극성스러운 왜구가 해안을 토색질하는 것은 예견된 일이기에 부처님 힘으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자신을 불태워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왕은 깨달음도 남달랐다. 죽음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감을 알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지난날의 영웅도 모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능을 크게 만들어도 세월이 흐르면 나무꾼과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기가 굴을 팔 것이다.’ 라는 기록만 봐도 그의 깨달음은 천년을 뛰어넘는 위대한 통찰이다. 또 삼국유사에서 지의법사에게 늘 자신은 죽어 호국 대룡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겠다고 말했다. 지의법사가 “용은 축생보가 되는데 어찌합니까?” 하니 왕은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인지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면 짐의 뜻에 합당하다.” 라고 답한다. 이처럼 왕은 짐승으로 환생하는 업보조차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호국’의 길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감포 바다 수중 왕릉 대왕암 앞에 섰다. 생즉사 사즉생의 문구가 눈앞에 일렁거린다. 사후까지 잘살아 보겠다던 숱한 왕들은 땅속에서 무거운 침묵에 빠져 죽음을 살고 있고, 뜨거운 장작불에 몸을 불살라 나라를 지키려던 문무왕은 후손들의 가슴 속에서 뜨겁게 살아가고 있다. 끝나버린 죽음과 천년을 살아온 죽음이 오롯이 대비를 이룬다. 요즘처럼 일본과의 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는 왕이 보내준 보물 만파식적이 그립다. 피리소리에 묘책이 얹혀 달려오기라도 한다면 위기를 넘어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여행자의 가슴에 청량제가 된다. 하얀 포말을 담은 푸른빛 바다를 거느리고 오늘도 문무왕은 나라를 지키는 작전회의 중일 것이라는 믿음을 위안 삼으니 돌아오는 발길이 한결 가벼워진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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