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륵사 폐탑과 구미의 석탑||탑 불교에서 신성시, 구미 대표적인 7개 석탑 가운데

▲ 주륵사 폐탑. 통일신라시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폐탑지 너머로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아도화상이 건립한 도리사가 있는 냉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 주륵사 폐탑. 통일신라시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폐탑지 너머로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아도화상이 건립한 도리사가 있는 냉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탑은 부처의 유골이나 유품 등을 모셔 두고 공양하기 위해 높게 만든 건조물이다.

초기에는 부처의 사리를 묻고 돌이나 흙을 쌓아 만든 봉분 형태였다. 탑의 형태가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인도의 탑(탑파, 인도어로 스투파)이 중국으로 전파된 후이다.

중국은 황제가 정사를 보던 정전과 같은 궁중 건물을 명당 건축이라고 부르며 신성시했다.

앞서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라고 했는데 불교를 받아들인 중국인들 역시 황궁과 같이 탑을 신성시했다.

이런 탑의 형태가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탑 형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 아도화상이 건립한 도리사 내 석탑.
▲ 아도화상이 건립한 도리사 내 석탑.
우리나라 사찰에는 어느 곳 하나 빠짐없이 대웅전 앞이나 사찰의 중심에 탑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탑은 대부분 석탑이다. 질 좋은 화강암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목탑은 조선시대 건립된 법주사 팔상전 하나다. 흙으로 만든 전탑은 안동 신세동의 7층 전탑 등 5기가 남아 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석탑은 백제 후기에 만들어진 미륵사지 석탑이다.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고려중기 신륵사 다층 전탑, 경천사지 10층 석탑 등이 대표적인 탑으로 꼽힌다.



▲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5층 석탑.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석탑이다.
▲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5층 석탑.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석탑이다.
◆탑, 형태로 조성연대 구분

오래된 탑 대부분은 홀수 층이다. 이유는 뭘까. 이는 주역과 관련이 깊다.

중국 문화에서 세로는 하늘과 홀수·남자, 가로는 땅과 짝수·여자를 일컫는데 탑을 조성할 때도 이를 적용했다는 것이다.

탑은 세로로 3·5·7·9·13 등과 같이 홀수로, 가로는 4각·8각·12각형 등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이 원칙이 적용됐다.

이 같은 원칙은 통일신라와 고려 전기까지 탑을 제작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단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원각사지 10층 석탑처럼 짝수인 경우도 있다. 이는 10이 주역에서 온전한 수를 나타내는 수이며, 고려말 원의 간섭기에 만들어져서라고 학계는 해석한다.

또 탑은 그 모양을 보면 건립시기를 알 수 있다.

학자들은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탑을 가장 아름다운 탑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탑은 기단이 이중으로 되어 있고 기단의 면석이 3개, 탱주가 2개였다는 점이다.

또 옥개석은 한옥구조의 화려함을 모방해 옥개석 받침이 5개이다. 옥개석 받침은 건립 시기를 알아볼 수 있는 결정적 요소로 고려와 조선시대 옮겨오면서 그 숫자가 4개, 3개, 2개로 줄어든다.

아름다운 탑은 어떤 모양일까.

물론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눈으로 봐서 시원하고 비율과 비례가 잘 맞는 탑이다. 흔히들 석가탑을 최고로 꼽는 이유는 눈으로 봐서 시원하면서도 진중한 면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고려시대에 들어서 탑의 형태는 자율적인 양식이 강조된다. 옥개석 받침도 5개에서 4개로 줄고, 층수도 3층에서 벗어나 다층 구조로 변한다. 모양은 통일신라의 석탑처럼 날씬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이 같은 원칙이 사라진다. 억불숭유 정책에 따라 조정은 물론 백성의 관심이 줄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이것저것 섞인 듯한 그러면서도 무겁고 뚱뚱한 형태로 변한다.

조선시대 석탑에 대해 자현스님은 ‘사찰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잘 차려진 한정식이 아닌 국밥처럼 여러 가지가 아무렇게나 섞여 있는 것”이라고 혹평했다.

◆구미(선산)의 석탑

그럼 구미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탑은 어느 것일까. 지역 향토사학자로 석탑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전정중 현일고 교사는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만들어진 석탑 7곳을 구미지역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소개한다.

죽장사지 오층석탑(국보 제130호), 낙산동 삼층석탑(보물 제469호), 도리사 석탑(보물 제470호), 강락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186호), 주륵사지 석탑(문화재자료 제295호), 죽림사지 사층석탑, 도중동 사지 석탑 등이 그것이다.

그는 도리사 석탑과 도중동 사지석탑을 제외한 나머지 5개 석탑의 건립 연대가 통일신라시대라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구미(선산)지역도 신라문화의 중심인 경주지역처럼 불교관련 유적과 유물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으며 특히 거대하고 웅장한 7개 석탑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정치적 종교적 지배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했다.

▲ 주륵사 폐탑지 가는길.
▲ 주륵사 폐탑지 가는길.
◆폐탑만으로 그 규모 짐작할 수 있는 주륵사 폐탑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 산 123번지 상주∼영천 간 고속도로 너머로 아주 오래된 폐사지가 있다.

선선한 가을 바람을 따라 도개면 다항마을을 향하다 주륵사 폐탑지라는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하면 비포장길이 이어진다.

이곳에서 450m 떨어진 곳에 1천여 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륵사 폐탑이 있다. 고속도로 박스를 지나 조금 평평한 곳에 주차하고 작은 하천을 건너 오르막을 오른다.

▲ 주륵사 폐탑지에 있는 각종 석재.
▲ 주륵사 폐탑지에 있는 각종 석재.
가파른 오르막길 끝에 조금은 넓고 평평한 폐탑지가 있다. 1천 년 넘게 이 자리를 지켜 온 주륵사지 폐탑의 옥개석과 기단석 등이 널려 있다.

폐탑지 주변엔 멧돼지들이 뛰어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이곳 주변에 많은 묘소가 있는데 묘소에 사용된 석상 등이 주륵사지의 탑재와 기단석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 주륵사 폐탑지에 있는 옥개석. 옥개석 받침돌이 5개인 것으로 보아 이 탑이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 또한 커서 경주 석가탑과도 견줄 만 하다.
▲ 주륵사 폐탑지에 있는 옥개석. 옥개석 받침돌이 5개인 것으로 보아 이 탑이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 또한 커서 경주 석가탑과도 견줄 만 하다.
주륵사 폐탑은 현재 남아 있는 옥개석의 규모로 짐작할 수 있다. 폐탑 옥개석의 추녀 너비는 제1지붕 돌은 236㎝, 제1지붕 돌의 5단 받침의 최하 너비는 144㎝로 매우 큰 탑 축에 든다.

이를 근거로 학자들은 주륵사 석탑이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 못지않은 대규모의 석탑이었으며 3층이나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옥개석 받침이 5개로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형태도 당대의 수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탑의 규모로 주륵사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주륵사는 냉산을 마주한 청화산 중턱에 있다. 냉산에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아도화상이 건립한 도리사가 있다. 주륵사는 기록을 통해 흥망성쇠를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주륵사는 냉산 서쪽에 있으니 고려 안진이 찬한 승 혜각비명이 있다’고 전하고 선산부사를 지낸 최현은 일선지에 ‘주륵사는 백마산(지금의 청화산) 아래 있으며, 고려 안진이 찬한 승 혜각비명이 있다. 부사 이길배가 남관을 지을 때 기와를 철훼하여 폐허가 되어 지금은 유지만 있다’고 기록했다.

또 태종실록에는 ‘주륵사의 주산에 물에 솟아올라 모래가 무너지면서 절을 덮쳐 2명의 승려가 돌에 눌려 죽었다’고 한다.

이처럼 주륵사는 여러 기록을 통해 실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통일신라시대 신라 불교 초전지며 성지인 구미에 건립된 후 고려 왕실의 불교 장려에 힘입어 큰 사찰이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억불숭유와 영남학파의 번성으로 움츠러들기 시작해 부사 이길배가 남관을 수리할 때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최현이 선산 부사를 지낸 조선 중기에는 이미 폐찰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주륵사 폐탑은 남아 있는 석탑재, 특히 옥개석 받침돌의 크기로 미뤄 경주 석가탑과도 견줄 수 있는 큰 탑이라고 했다.

제대로 보존됐더라면 신라불교 초전지인 구미지역의 자랑이 될 만하다.

구미시는 기록에만 남아있는 주륵사지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주륵사 탑을 복원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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