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그는/ 천양희

죽음만이 자유의지라고 말한 쇼펜하우어/ 정작 그는/ 여든이 넘도록 천수를 누렸고요/ 자녀 교육의 지침서인 『에밀』을 쓴 루소/ 정작 그는/ 다섯 자식을 고아원에 맡겼다네요/ 백지의 공포란 말로 시인으로 사는 삶의 고통을 고백한 말라르메/ 정작 그는/ 다른 시인보다 평생을 고통없이 살았고요/ 『행복론』을 써서 여덟 가지 행복을 말한 괴테/ 정작 그는/ 일생 동안 열일곱 시간밖에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네요// 정작 그는 알고 있었을까요/ 변명은 구차하고 사실은 명확하다는 것을요/ 정작 그는 또 알고 있었을까요/ 위대한 사상은 비둘기 같은 걸음걸이로/ 이 세상에 온다는 것을요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 (문학과지성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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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꿈과 현실이 다르고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 예상한 대로 굴러가지 않으며 규칙적이지도 않다. 그 불균형은 유명한 석학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아이러니는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발견된다. 위대한 예술작품을 남긴 창작자의 삶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는 경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다. 셰익스피어는 매점매석과 고리대금으로 돈을 벌고 탈세를 일삼았다. 불우한 유년기를 거쳐 절대왕정 말기 프랑스에 정착한 루소는 모순적 인물의 극치였다. 그의 사회계약개념은 ‘자유, 평등, 박애’ 정신으로 이어져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고, 자연주의적 교육관이 담긴 소설 ‘에밀’은 자녀교육의 혁명적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정작 루소 자신은 다섯 아이를 모두 고아원에 내다버렸다. 더구나 그 아이들의 엄마를 처음 만난 것도 잠깐 재미를 보기 위해서였다. 정말 루소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물이었다면 ‘에밀’의 가치도 다시 평가되어야할까. 세상에는 인격적으로 개차반인 자가 만든 걸작도 있고 성인군자의 졸작도 있다. 만약 사람과 업적이 분리될 수 없다면 루소의 걸작도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저자와 저서를 구분하는 게 타당하지만, 공적인 판단을 요구할 때 창작자와 창작물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리라. 아무리 위대한 작품을 썼다한들 작품의 위대함을 방패삼아 작가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루소의 명성은 높았지만 그의 삶은 불안정했다. 당대 계몽사상파들과 틀어졌고, 정부와 교회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며 피해망상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는 이곳저곳 먼지처럼 부유하다가 노년에 이르러 간신히 시골농원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식물학에 빠져들었고 채집과 산책을 즐기다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루소의 사후에 발간한 ‘참회록’은 자연 그대로의 자기 모습이라고 선언한 자서전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배신과 방기, 도둑질, 중상모략 등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여성에게 볼기짝을 맞으며 쾌감을 느낀 일까지 서슴없이 고백한다. 그렇듯 철학사에서 루소만큼 말이 많고 평가가 다층적인 인물도 드물다.

‘변명은 구차하고 사실은 명확하다’ 위대한 사상은 사소한 발견에서 온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처럼, 위대한 창작 또한 조그만 영감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루소는 오랫동안 방광염을 앓았다. 자연히 많은 시간을 변기 위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의 위대한 사상도 화장실에서의 명상이 기초가 되었으리라. 위대한 사상과 예술은 어쩌면 ‘비둘기 같은 걸음걸이’로 이 세상에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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