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소원 / 이시영

내 나이 마흔일곱/ 나 앞으로 무슨 큰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진즉 그것을 알았어야지!)/ 틈나면(실업자라면 더욱 좋고)/ 남원에서 곡성 거쳐 구례 가는 섬진강 길을/ 머리 위의 굵은 밀잠자리떼 동무 삼아 터덜터덜 걷다가/ 거기 압록 지나 강변횟집에 들러 아직도 곰의 손발을 지닌/ 곰금주의 두툼한 어깨를 툭 치며/ 맑디맑은 공기 속에서 소처럼 한번 씨익 웃어보는 일!

- 시집 『사이』 (창비,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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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의 어느 시에서처럼 가을엔 어디를 가다 이쯤에서 길을 탁 잃어버리고 마냥 떠돌이가 되어 한 열흘 아무렇게나 쏘다니다 왔으면 좋겠다. 기차와 도보를 결합한 여행도 좋고 몇 해 전 출시된 고속버스 프리패스를 이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 서울 부산 왕복 심야고속 요금에도 미치지 않은 금액인 75,000원이면 평일 4일 동안 전국 고속버스가 다니는 어느 곳에나 횟수와 시간 등급 관계없이 맘대로 이용할 수 있다니 노선계획만 잘 세우면 다른 교통수단보다 일단은 가성비가 괜찮은 것 같다.

어디에 메이지 않은 후줄근한 신분이면 더욱 편하겠다. ‘남원에서 곡성 거쳐 구례 가는 섬진강 길’따라 가다 압록 다리께 식당에 들어 다슬기수제비 한 그릇 사먹을 돈에다가 걷다, 기어이 다리 곤해지면 아무렇게나 시골버스 잡아탈 노잣돈이나 마련하여 쑤셔 넣으면 그만이겠다. 휴대폰은 두고 가면 더 좋겠지만 자칫 불필요한 오해가 있을 수 있어 가지고는 가겠는데 배터리 충전에 신경을 곤두세우진 않으리라. 그리 높지 않은 산길을 걷다 가지가 많이 뻗은 방향으로 작정 없이 전진하리라.

가다가다 물빛이 반짝이는 곳, 엉덩이 얹어도 아프지 않을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아 조각구름을 보다 마침 된장잠자리가 북상하는 길을 따라 함께 매진한들 어떠랴. 길을 잃고 다시 사람 그리운 세상의 물가 어디쯤 오대천 골지천 몸을 섞는 아우라지 나루터에나 가볼까. 예순 중턱 고갯마루를 넘어 슬금슬금 기어가는 몸, 노을빛 흔들리는 철든 바닷가 모래 위에 벌렁 드러누워 어린 꿈을 꿀까. 나 마찬가지로 앞으로 무슨 큰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하니 서두러거나 조바심 낼일 따위는 없으리라.

돌아오는 길 충주 지나 이천 땅을 거쳐 곤지암 쯤에 당도하면 맑은 공기 다 뱉어내고 사는 일이 막막한 그 까닭 시시콜콜 묻지 않은 채 나도 소처럼 씩 한번 웃어보는 일, 그것 ‘맑디맑은 공기 속에서’ 이 가을의 소원이라고 해두자. 옛날엔 나라와 조정이 어지럽거나 만사 복장이 뒤틀릴 때는 낙향하여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들이 많았다. 하지만 녹을 먹는 신분도 아니고 장차에도 일 없으니 그저 침 한번 뱉어내고 자유로운 떠돌이면 족하리라. 돌아다니다 부러 누굴 만날 일도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 호사를 구가하기위해서도 필요한 조건이 있긴 있다. 지나치게 구차하지 않을 만큼만 돈으로부터의 자유, 팍팍한 시간으로부터의 자유, 몸을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 그렇다, 무엇보다 심장과 다리가 건재하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다. 그리고 또 하나, 주위의 시선과 편견으로부터의 자유다. 올해는 꼭 ‘가을의 소원’을 실행에 옮겨볼 참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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