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일반

작명의 즐거움

작명의 즐거움/ 이정록

콘돔을 대신할/ 우리말 공모에 애필(愛必)이 뽑혔지만/ 애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중 한글의 우수성을 맘껏 뽐낸 것들을 모아놓고 보니/ 삼가 존경심마저 든다// 똘이옷, 고추주머니, 거시기장화, 밤꽃봉투, 남성용고무장갑, 올챙이그물, 방망이투명망토, 육봉두루마기, 똘똘이하이바, 꿀방망이장갑, 거시기골무, (중략)// 아, 시 쓰는 사람도 작명의 즐거움으로 견디는 바/ 나는 한없이 거시기가 위축되는 것이었다/(중략)/ 애보기글렀네, 짱뚱어우비, 개불장화를 나란히 써놓고/ 머릿속 뻘구녕만 들락거려보는 것이었다

- 시집『정말』(창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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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대남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가 몇 년 전 우리 한글날에 ‘우리말과 글이 천시당하는 비극적 현실’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남조선의 외래어 남용은 조국통일 위업에 커다란 독’이라며 대한민국의 언어문화를 비난하고 나선 일이 있다. 당시 언론매체를 ‘안 좋은 예’의 주범으로 꼽으면서 ‘인사이드 월드’, ‘뉴스메이커’, ‘뉴스피플’, ‘뉴스라인’, ‘뉴스투데이’, ‘뉴스이브닝’ 등 잡지와 방송의 보도관련 제목, 출판물, 간판들의 외래어 사례를 지적했다. 한글의 보존과 발전만큼은 자기네들이 우리보다 낫다는 생각에서 벌인 선전일 터이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에 대꾸할 구실이 궁색한 것도 우리의 현실이다. 여전히 우리사회 곳곳에선 외래어로 표기해야 좀 더 그럴듯하고 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언젠가 국회의 법안 협상과정에서 한 의원이 “여당의 입장이 클리어해진 뒤에야 그 다음 스텝으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있는 걸 보았다. 이런 언어습관 자체로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 ‘시 쓰는 사람도 작명의 즐거움으로 견디는 바’ 분발을 좀 해야겠다. 처음엔 어색한 느낌이 들어도 자꾸자꾸 쓰다보면 이내 친숙해질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우리의 언어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이미 굳어버린 것까지 억지로 다른 말을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으리라. 지금은 단일민족이니 배달민족이니 하는 인종순혈주의를 포기한 지 오래인 다문화사회이다. 언어는 시대와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한 민족의 국민정신을 이끄는 시발점이면서 문화발전의 토대를 이룬다. ‘콘돔’을 ‘똘이옷’이나 ‘거시기 골무’라 칭하듯 작명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면서도 유연한 언어정책을 갖는 것은 나쁘지 않으리라

전문가들은 남한과 북한의 언어 차이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지적한다. 북한에서는 외래어와 한자를 우리말로 많이 바꾸었고, 남한에서는 외국어의 사용이 증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남북이 사용하는 낱말의 30% 이상이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일없다(괜찮다)’, ‘방조하다(도와주다)’, ‘소행(칭찬할만한 행동)’ 등 남한에서는 부정적 의미가 강한 말이 북한에서는 긍정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처럼 남북한 언어의 격차가 심해진 가장 큰 원인은 그동안의 언어 정책은 물론 생활환경과 의식 구조의 차이가 심화된 탓이다.

지난 한글날 이낙연 국무총리는 남북이 겨레말 큰사전 공동 편찬을 위해 다시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밝혔다. 사용하는 말이 다르면 상호 불신과 위화감이 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에 남북 교류를 활성화하여 언어의 차이를 좁히는 사업은 매우 중요하다. 겨레말사전편찬사업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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