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려상 신숙자

말은 할 탓이고, 길은 갈 탓이라 했던가. 한적한 시골길로 우회하다 고향 동산 같은 솔밭 언저리에 닿았다.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은 마을 입구에는 매미들이 야단법석이다. 쉴 새 없이 울어 대는 고고성에 귀가 찢어질 듯 쩌르렁거린다.

표지판이 없다면 말무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도린곁에 자리한 언총言塚이다. 무슨 곡절로 이처럼 속박됨이 없는 예천군 지보면에 말무덤이 생겼을까. 콩밭과 봉분 사이에 경계선이 없어 다가서기가 수월치 않다. 빙 둘러 무덤 앞에 서자 인적에 놀란 방아깨비들이 화들짝 달아난다. 떼가 잘 앉은 봉토 위로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올라선다.

진즉에 묻어 버려야 할 말 보따리가 내 가슴에도 있다. 뱉은 사람은 잊고 사는데 상처가 된 말은 옹이처럼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남이라면 영영 안 보면 그만이지만 가족이라 미워할 수도 없다. 그동안 어디에서도 풀지 못했던 말 보따리를 이곳에다 묻어버린다면 돌아가는 길은 민들레 홀씨처럼 가벼워지지 않을까.

여러 해 전, 시어머니 장례를 치르느라 다들 지쳐 있을 때였다. 아랫동서가 혼자 밥 먹기 눈치 보인다면서 같이 한술 뜨자고 했다. 장례 기일이 사일 장이라 웬만한 손님은 다 치른 뒤였다. 먹는 일까지 큰동서 눈치 보는 일이 못마땅해 국밥 한 그릇 같이 들었다가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삿대질을 받았다. 이유는 손님들 있는 데서 상주가 숟가락을 든다는 것이었다.

비록 부모를 땅에 묻어야 하는 죄인이지만, 먹는데 눈치 주는 큰동서나 밥그릇을 들고 눈치 보는 아랫동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솜뭉치같이 순한 아랫동서를 대신해서 밥은 먹어야 견딜 것 아니냐고 대꾸했다가 안 그래도 우울한 초상집에 찬바람만 더 일으켰다. 상주의 신분이 아니었더라면, 또 동서의 만류가 없었다면 그간 섭섭했던 말들을 죄다 짚고 넘어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동안 큰동서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부모 맏잡이라는 옛말이 아니라도 나이로 보나 서열로 보나 대들 수 없는 상대다. 마음의 문이 닫힐수록, 뱉고 싶었지만 뱉지 못했던 말들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었다. 쓴 뿌리 같았던 말들을 가슴에 쟁여 둘 것이 아니라 그곳이 어디든 나만 아는 말무덤에다 묻었더라면 여태 마음 밭이 척박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내가 지은 구업口業이 친구의 심장에 비수가 되어 꽂힌 적이 있었다. 남편과 헤어지면서 아들 둘 양육권까지 빼앗긴 친구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입때까지 니가 어떻게 살아왔으면 아이들이 엄마를 버리고 아빠를 선택했을까.” 일침을 맞은 친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안 그래도 이혼이라는 쓰라린 상처를 입은 친구에게 불화살을 꽂은 격이 되었으니 실언도 이만저만 큰 실언이 아니었다.

사람 입에서 나온 독은 뱀독보다 무섭다고 했다. 위로는 못 할망정 망언을 뱉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누군가의 신발을 직접 신어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상대의 처지를 바꾸어 보는 것만이 악담을 줄이는 최선일 것이다. 큰소리친다고 해서 옳은 말이 아닌 것처럼, 할 말을 못 한다고 해서 바보는 아니지 않은가.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우물쭈물 넘어 가버린 자신의 언행이 한심스러워 도리질 쳐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의 수단을 꼽으라면 단연코 말이 으뜸이다. 필요에 의해 오고 가는 말이지만,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총칼보다 강한 실언으로 상대의 가슴에 상처 주기가 비일비재하다. ‘쌀은 쏟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고 했다. 한번 입 밖에 낸 말실수는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가르침을 매미들이 떼창으로 일러준다. IT 산업이 발전하면서 온라인상에서는 오프라인에서 하는 말보다 더한 모욕감으로 타인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익명성을 믿고 무심코 던진 몇 줄의 댓글이 날카로운 도끼가 되어 타자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다. 말의 힘이 얼마나 컸으면 악성 리플에 시달린 연예인들이 자살로까지 이어질까.

각성바지들이 모여 살면서 사사로운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마을이지만, 말무덤이라는 처방으로 평온을 찾았다. 인터넷 세상이라고 말무덤이 없는 건 아닐 성싶다. 어디라도 좋을 나만의 가묘를 만들어 놓고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복토한다면 온라인 세상도 한층 더 정화되지 않을까. 상대방에게 모욕과 치욕을 주기보다 용기와 희망이라 선한 댓글로 응원한다면 서로의 마음이 따뜻해지리라 믿는다.

구업여산口業如山이라 했던가. 올라선 말무덤이 예사롭지 않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속을 비워냈으면 봉분의 크기가 왕릉을 닮았다. 예천군 지보면 마을 사람들이 온갖 잡말이 묻힌 오백 년 고총을 오늘날까지 지켜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혼자 살 수 없는 인간 세상, 어떤 형태로든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름 평화를 위해 고안해낸 말무덤에서 삶의 지혜를 배운다.

말무덤을 돌아서려니 또 다른 누군가의 가슴에 말 방아를 찧어댄 일이 없는지 걱정스러워진다. 살면서 알게 모르게 뱉은 실언이 어디 한두 마디뿐이었겠는가. 내가 뱉은 말실수가 누군가의 가슴에 상처가 되어 있지 않기를 빌어볼 뿐이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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