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 박남준

저기 저 숲을 타고 스며드는/ 갓 구운 햇살을 고요히 바라보는 것/ 노을처럼 번져오는 구름바다에 몸을 싣고/ 옷소매를 날개 펼쳐 기엄둥실 노 저어 가보는 것/ 흰 구절초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김치 김치 사진 찍고 있는 것/ 그리하여 물봉숭아 꽃씨가 간지럼밥을 끝내 참지 못하고/ 까르르르 세상을 향해 웃음보를 터뜨리는 것/ 바람은 춤추고 우주는 반짝인다/ 지금 여기 당신과 나/ 마주 앉아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는 것/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연은 그런 것이다/ 나무들이 초록의 몸속에서/ 붉고 노란 물레의 실을 이윽고 뽑아내는 것/ 뚜벅뚜벅 그 잎새들 내 안에 들어와/ 꾹꾹 손도장을 눌러주는 것이다/ 아니다 다 쓸데없는 말이다/ 한마디로 인연이란 만나는 일이다/ 기쁨과 고통,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물들어간다는 뜻이다

-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실천문학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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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구절초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김치김치 사진 찍고 있는’ 언덕 빼기마다 ‘바람은 춤추고 우주는 반짝인다.’ 정읍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구절초 축제’가 한창이다. 구절초는 이 계절 우리 산하 모든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구절초를 다른 꽃과 변별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안도현의 ‘무식한 놈’이란 시가 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길을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나도 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고 들을 때뿐이지 확실하게 가려내지 못했다.

안도현 시인도 그 후로 꽃과 나무의 이름에 대하여 무식하기 짝이 없는 자신과 완전하게 결별했다고 하였지만, 나는 여전히 ‘무식한 놈’을 면치 못하고 있어 쑥부쟁이와 구절초 정도는 가려낸다 해도 숱한 야생화의 이름들을 헷갈려한다. 구절초는 꽃대 하나에 하나의 꽃만 피우고 희거나 엷은 분홍색을 띄는데 비해, 쑥부쟁이는 길가 아무데나 볼 수 있고 향기가 별로 없는 연보라색 꽃이란 정도는 들어 알고 있으나 아직도 자신만만하지는 않다. 그 지경이다 보니 지금까지 꽃을 제재로 시를 쓴 기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구절초와 쑥부쟁이 감국 산국 벌개미취 개미취 등의 가을꽃들을 뭉뚱그려 ‘들국화’라고 흔히 부르는데 식물도감에는 들국화란 꽃은 존재하지 않는다. 깊게 따지지 않으면 모두 들에 피는 국화과의 꽃이어서 틀린 이름도 아니다. 높지 않은 산길에 그리고 호젓한 못 둑에 소박하고 수수하게 피어있는 가을꽃들은 모두가 그놈이 그놈 같다. 그 가운데 구절초는 좀 더 한갓진 곳에서 볼 수 있는데, 음력 9월9일(바로 어제)이면 아홉 마디가 되어 꽃을 채취한다 해서 구절초라 불렸고 바로 이 시기가 그 절정이라는 의미이다.

청초하게 피어있는 그 가녀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없던 감성이 되살아나기도 하고 불현 듯 ‘까르르르 세상을 향해 웃음보를 터뜨리’기도 하겠다. 자연히 시공을 거슬러 좁은 길로 들어서게 되면 ‘지금 여기 당신과 나, 마주 앉아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는 것’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는 것’ ‘인연은 그런 것이다’ 구절초는 흰 꽃잎이 신선보다 더 돋보인다 하여 ‘선모초’라고도 하는데, ‘기쁨과 고통, 모든 것을 받아들’여 ‘사랑으로 물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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