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에 대한 숙고/ 정한용

몇 년 전부터 노안인가 싶더니, 이젠 안경이 잘 안 맞는다. 양쪽이 서로 어긋난다. 왼쪽으로 보는 세상은 흐리지만 부드럽고 따뜻한데, 오른쪽으로 보는 세상은 환하지만 모가 나고 차갑다. 둘 사이의 불화와 냉전에 속앓이가 심했는데, 알고 보니 오래 쌓인 원한이 있었다. 수구와 진보의 싸움은 식상한 것이 되었고, 훈구와 사림의 대립도 짓물렀다. 정상과학을 두고 벌인 칼 포퍼와 토마스 쿤의 논쟁에 대해서는 논문으로 까발린 적도 있다. 새는 두 날개로 난다고 리영희 선생께서 일갈했지만, 나는 차라리 두 세상을 따로국밥처럼 몸속에 나눠놓고 살겠다. (하략)

- 시집 『거짓말의 탄생』 (문학동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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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지만 우리의 정치 현실이 참으로 암울하고 또 참담하다. 이 나라의 정치가 이토록 퇴행적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무얼까. 과연 이 나라에 정치적 이상과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정치인들이 몇이나 될까. 상식적인 인식의 합의 아래 서로 경쟁하고 다투면서도 거대한 구심력이 가동되길 바라건만, 끊임없이 상대를 부정하며 골을 파기에만 골몰하는 그들에게 절망의 탄식이 절로 나온다. 협력과 상생의 정치는 고사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이상적 패러다임이 존재하기는 할까.

이는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정치가 모든 국민에게 적용되려면 그 총론을 받아들이는 국민들의 생각 또한 같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다른 여러 가치관 차이가 있겠으나 우리 사회는 두 종류의 인식이 편을 갈라놓고 말았다. 북한을 오로지 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과 현실적인 위협을 가져다주는 적이기도 하지만 형제 동포라는 생각으로 보듬자는 사람들이다. 그 인식이 좌와 우를 가르고 수구와 진보로 나뉘면서 모든 가치판단 기준을 빨아들인다. 남쪽은 절대선이고 북쪽은 절대악이라 여기는 구시대의 대결구도 안에 여전히 우리는 갇혀있다.

시대의 변화에 부응한 이념적 갱신을 거부한 채 낡은 세계관에 함몰된 한국의 정치는 ‘오래 쌓인 원한’을 끌어안은 채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심각하게 ‘양쪽이 서로 어긋나’는 것은 각기 다른 패러다임 안에서 휘두르는 주먹질 탓이다. 이는 리영희 선생께서 말씀한 새의 두 날개로도 설명되지 않는 개념이다. 성장이냐 분배냐 같은 정책적 관점 차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토머스 쿤’은 패러다임이란 개념을 처음 학문 안으로 끌어왔다. 그는 새로운 이론들이 정립되면 기존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되는 과학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였다. 그 이론은 사회과학에까지 일파만파의 반향을 일으켰다.

상이한 패러다임은 비교할 수 없고 공통분모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통섭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로 잘 알려진 ‘칼 포퍼’와의 뜨거운 논쟁은 유명하다. 서로 다른 패러다임이란 지동설을 신뢰하는 사람들과 천동설을 굳게 믿는 사람들의 인식만큼이나 큰 간극을 의미한다. 천동설에서의 제 문제들은 지동설에는 별로 중요치 않고, 천동설의 문제해결 방법은 지동설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이 나라의 정치와 그걸 수용하는 국민 태도의 양상이 이와 다르지 않다. 각기 다른 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형국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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