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일반

학문의 자유에 대한 단상

학문의 자유에 대한 단상

오철환

객원논설위원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가 강의실에서 한 발언이 매스컴을 세게 타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이라는 취지의 발언과 ‘궁금하면 한 번 해보겠느냐’는 말이 논란의 핵심이다. 뜬금없다. 그러나 뭔가 개운하지 못하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생각이 결코 같지 않다는 점과 그 본질은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로 깔고, 이 민감하고 위험한 이슈에 매몰되어 소홀히 하기 쉬운 측면에 대한 찜찜한 소회를 감히 토로해 본다.

정년을 앞둔 노련한 교수가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수업시간에 거론한 것은 어떤 콘텐츠를 학생들에게 이해시킬 의도였을 법하다. 어떤 사안에 대한 교수방법은 재량의 영역이다.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헌법적 가치로 보장되는 상황에서 교수방법에 대한 개인적 스타일은 통제 영역 밖의 사항이라는 뜻이다.

학문 연구는 통설과 다른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주장이 기존 통설을 뒤엎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학문은 그런 토대위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그러했고, 다윈과 아인슈타인이 그러했다. 이는 비단 과학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미술의 피카소, 음악의 쇤베르크, 철학의 니체, 경제학의 케인스 등 수많은 천재들이 기존의 통설을 뒤엎고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미래도 그럴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학문의 자유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다. 이런 시각으로 류 교수 논란을 보면 불편한 진실이 민낯을 드러낸다. 상식과 교양을 가르치는 의무교육기관도 아니고 학문 연구의 도량에서,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강의 중 나온 교수의 발언을 선정적으로 조리돌림하는 모습이 불편하게 다가온다. 학문의 자유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기엔 그 대가가 너무 크다. 교수의 강의는 일차적으로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평가를 받는다. 대학 강의는 스스로 선택한다. 소문난 명강은 많은 학생들의 선택을 받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점차 도태되기 마련이다. 논란이 있다면 교실에서 삭여야 한다. 학생들의 평가가 현실적 한계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면 학계의 엄중한 검증이 기다리고 있다. 세월이 제자리를 찾아준다. 학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추상같다. 학문을 판단하는 저승사자는 당대의 여론이나 정치 세력이 아니라 역사다. 여론에 배치되는 논리나 엉뚱하게 보이는 학설이 당시엔 뭇사람들의 공분을 산다 하더라도 그때마다 맞서서 응징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언젠가 응분의 평가가 내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면 통설이나 기존 학설과 다른 이론이 빛나는 경우가 많다. 소수설을 존중하는 풍토가 학문 발전을 견인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이유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단죄하던 종교재판, ‘신은 죽었다’는 니체에 대한 비난,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의 반발 등을 현대적 시각에서 부당하다고 보는 사람이라면, 현재 내 견해와 다르다는 이유로 학문의 자유를 막는 일은 감히 하지 못할 터다. 학문에 대한 제약은 역사의 몫이다. 학문의 자유에 대한 인내는 비록 쓰겠지만, 그 보상은 달다.

협량한 시각에 익숙하다 보면 흔히 생각이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 어떤 사안에 대한 의견이 각자 다른 현상을 정상이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배척하는 배타적 태도는 과감히 청산되어야 마땅하다. 세계는 제4차 산업혁명으로 분주하다. 이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에게 발상의 전환과 창의적 착상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소 거슬린다는 이유로 개성과 창의성을 말살할 수는 없다. 개성과 창의성은 학문의 자유를 먹고 자란다. 색다른 콘텐츠는 그 결과물이다. 학문의 자유를 부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거친 목소리가 듣기 싫더라도 때론 모른 척 하고 지켜보는 것이 어른스럽다.

정치도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진화할 필요가 있다. 상대 정당에 대한 무조건적 비난과 반목을 지양하고 건전한 정책 대결로 승부해야 한다. 진영논리에 휩싸여 상대방 주장이라면 무조건 반대하고 비난하는 일은 이제 종지부를 찍을 때다. 학문과 종교를 정쟁의 대상으로 끌어들여선 더더욱 안 된다. 학문과 종교의 자유는 정치가 결코 침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정당의 목적은 정권 획득에서 국민의 행복추구로 가야 한다. 국민 행복에 얼마나 더 기여할 것인지를 두고 경쟁할 일이다. 국민 행복을 향상시킬 능력이 있는 사람을 대표로 선택하고, 국민 행복 수준을 고양하기위하여 좋은 정책을 내어놓는 정당에 표를 주어야 한다. 국민이 현명해야 정치가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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