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다/ 장철문

여기저기 이틀이 멀다 하고 부쳐오는 우편물이 지겹다/ 봉투를 뜯는 것이 지겹다/ 재활용 박스에 던져 넣는 것이 지겹다/ 읽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지겹다/ 쓰지 못한다는 부담이 지겹다/ 신통찮은 것밖에 갖지 못했다는 열패감이 지겹다/ 책을 쌓는 것이 지겹다/ 그 위에 또 책을 사다 쌓는 것이 지겹다/ 이를 악물고라도 읽지 않으면/ 몇 푼의 용돈마저 벌 수 없는 것이 지겹다/ 누구는 무슨 상을 탔고 누구의 정치는 낮고/ 안주만 씹는 것이 지겹다/ 시가 아니면 세상의 줄을 놓칠 것 같은 이 위기감이 지겹다/ (중략)/ 지겨워하는 내가 지겹다// 시여, 바라보고바라보고 바라봐도 너는 왜 떨어지지 않느냐?

- 제51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목화밭 지나서 소년은 가고』(현대문학,2006)

....................................................................

‘지겹다’는 같은 상태가 오래 지속되어 진저리가 날 정도로 지루함과 싫증을 느낀다는 말이다. 영어에서는 피곤하다는 뜻의 tired를 쓰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좀 더 강도가 센 아프다는 의미의 sick을 주로 사용한다. I’m sick of my life는 ‘사는 게 지겹다’는 말이고, I’m sick of you는 이제 ‘너한테 질렸다’는 뜻이 된다. 이는 헤어지자는 뜻을 가장 솔직하게 담아내는 말이면서 상대에게는 크나큰 상처가 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처럼 고통스러우리만큼 지긋지긋하다는 뜻인데, ‘이틀이 멀다 하고 부쳐오는 우편물이 지겹다’함은 어떤 심정인지 이해는 하겠는데, 그게 책일 경우 보낸 사람의 성의를 생각한다면 대놓고 내뱉을 언사는 아닌 것 같다.

내 사정도 닮았으나 그 지경까지는 아니다. 지난번 이사 오면서 다른 책들은 많이 내다버렸지만 증정 받은 책은 거의 그대로 옮겨왔다. ‘재활용 박스에 던져 넣는’ 무례는 손이 오글거려 웬만하면 저지르지 않으려고 한다. 시집을 따로 분류해 꽂아둘 책장도 추가로 마련했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책을 보내줘 고마운 생각이 들어서이고 무엇보다 ‘읽지 못했다는 부채감’때문이다. ‘봉투를 뜯는 것’이 성가셔 며칠씩 한 구석에 방치하기 일쑤고 심지어 한 달이 넘도록 쌓여있는 때도 있다. 언젠가는 빚을 청산해야겠는데 이런 페이스로는 부채를 탕감하기가 버겁고 어쩌면 영영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가끔 시집을 보내놓고서 아무런 입질이 없을 경우 대뜸 싸가지 없는 놈이라 눈을 흘기는 사람이 있으며 때로는 인간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부쳐온 시집을 받고 아무런 응답을 하지 못한 부작위에 의한 잘못이다. 작위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그 서운함을 잘 알기에 부채감은 더 늘어나고 그로인해 우울증도 깊어졌다. 그리고 나도 ‘쓰지 못한다는 부담이 지겨’울 때가 있다. ‘신통찮은 것밖에 갖지 못했다는 열패감이 지겹’다가도 내 깜냥을 알기에 시는 못 쓰고 이 짓으로 시인의 직분을 연명해나간다. 또 ‘이를 악물고라도 읽지 않으면, 몇 푼의 용돈마저 벌 수 없는’ 자괴감이 들더라도 어쩔 수 없다.

시에다 군소리를 붙여 매일 납품하는 것이 때로는 숨이 차다. 원고 마감의 궁지에 몰려 허둥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시가 아니면 세상의 줄을 놓칠 것 같은 위기감 따위는 솔직히 느껴보지 못했다. 나도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다. 징글징글하게도 ‘내가 놓기 전에는 시가 놓지 않을 것’같은 불길한 예감이 가끔 엄습해도 좋겠다. 다만 요즘은 ‘낮은’ ‘정치’에 지치고 지겨울 때가 너무나 많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