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무렵/ 맹문재

흙냄새 나는 사람들의 사투리가/ 열무맛처럼 담박했다/ 잘 익은 호박 빛깔을 내었고/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 우시장에 모인 아버지들의 텁텁한 안부 인사 같았고/ 떡집 아주머니의 손길 같았다// 빨랫줄에 널린 빨래처럼 편안한 나의 사투리에도/ 혁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호치키스로 철하지 않아도 되었고/ 인터넷 검색이 필요 없었다/ 월말 이자에 쫓기지 않았고/ 일기예보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흙냄새 나는 사람들의 사투리를 태운/ 시내버스 운전사의 어깨가 넉넉했다/ 구멍가게 할머니의 얼굴이 사과처럼 밝았고/ 우체국에서 나온 사람들이 여유롭게 햇살을 받았다/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했고/ 신문 대금 수금원의 눈빛이 착했다

- 계간 《애지》 200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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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이렇듯 ‘겁나게’ 편안하고 ‘억쑤로’ 푸짐해야 마땅하다. 고향으로 달음박질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렇듯 무장해제를 당하기 위해서다. 말씀의 긴장이 필요치 않고 주머니가 좀 심심해도 상관이 없다. 혁대를 조일 이유도 서류를 매만질 필요도 없다. 일기가 어떻든 심히 염려할 바는 아니며, 인터넷이니 SNS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려도 나쁘지 않겠다. 얼마간은 탱자탱자하며 대체로 ‘운짐’달 일이라고는 없다.

추석 무렵의 고향은 지난 계절의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잘 익은 호박 빛깔을 내었으므로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 그러니 여기는 모두 황토빛깔의 동색이라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하고, ‘신문 대금 수금원의 눈빛’마저 착할 수밖에 없겠다. 고향이 반도의 어디든 모두 느낄 수 있는 고향의 정취요 정서인 것이다. 설령 체감하기 쉽지 않더라도 예전의 풍경을 전하는 이 시처럼 그러면 그런 것이고 그리 믿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향의 넉넉함과 안온함과 친근함도 하루 이틀 잠깐 머문다면 제대로 느끼기가 쉽지 않거니와 실효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오가는 시간 빼고 뭐 빼면 남는 게 없다. 다행히 올해 추석은 주말에 물려 4일 연장 휴일이니 휴가로서는 적당한 수준이다. 실속 있게 휴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여행가방을 미리 챙겨두었을 것이다. 이럴 때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내빼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은근히 얄밉기도 하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이런 말도 진짜로 입에서 송송 나올 것 같다. 오일장의 좌판도 전보다 물량이 훨씬 풍성해졌다.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추석물가도 저렴한 편이라고 한다. 알곡이 완전히 여물지는 않았지만 농심으로 들판은 출렁인다. 이럴 때 둥실 뜬 고향집 툇마루에 앉아 최소한 3분 이상은 달과 독대하면서 눈과 마음을 씻을 일이다. 떨어져 있던 온 가족이 어울려 맛난 음식 나눠먹으며 추억을 깔깔거려도 좋겠다.

느슨했던 가족애를 확인하고 엄마 품 같은 고향의 정취를 빵빵하게 충전해갈 수 있다면 답답하게 꽉 뭉쳐진 세상사도 조금은 부들부들해지리라. 그런데 시내를 다녀보니 거슬리는 게 눈에 띈다. 내년엔 총선도 있고 하니 이것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보면 그만인데, 난삽하게 내걸린 정치인들의 불법 추석인사 현수막. 사람들이 모두 구수해지고 착해져가는 마당에 민심인지감수성이 떨어진 그들만의 빳빳한 사심. 추석 풍경에 티가 아닐 수 없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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