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안리에서/ 강민

“이놈의 전쟁 언제나 끝나지. 빨리 끝나야 고향엘 갈 텐데.”/ 때와 땀에 절어 새까만 감발을 풀며 그는 말했다/ 부풀어 터진 그의 발바닥이 찢어진 이 강산의 슬픔을/ 말해 주고 있었다/ (중략)/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우리는 같은 또래끼리의/ 하염없는 얘기를 나누었다/ 적의(敵意)는 없었다/ 같은 말을 쓸 수 있다는 행복감마저 있었다/ 고급중학교에 다니다 강제로 끌려나와 여기까지 왔다는/ 그에게 나는 또 철없이 말했었다/ “북이 쳐내려오니 남으로 달아나는 길” 이라고/ 적의는 없었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중략)/ 그리고 새벽에 그는 떠났다/ “우리 죽지 말자”며 내밀던 그의 손/ 온기는 내 손아귀에 남아 있는데/ 그는 가고 없었다/ 냄새나고 지치고 더럽던 그의 몸과는 달리/ 새벽별처럼 총총하던 그의 눈길/ 1950년 8월 경안리/ 새벽의 주막 사립문가에서 나는 외로웠다

-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 (푸른사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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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안리는 경기도 광주를 끼고 흐르는 경안천 주변의 동리 이름이다. 1933년 서울태생인 강민 시인은 18세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1950년 8월이면 경기도는 물론 대구 부산을 제외한 남한 전역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당한 상황이다. 유엔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전력의 열세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지 못해 8월1일에는 낙동강전선까지 후퇴한다. 8월 내내 낙동강 방어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8월18일엔 부산으로 임시수도를 옮겼다. 뒤늦게 피난길에 오른 시인은 경안리 한 주막에서 우연하게 또래의 북한군 병사를 만난다.

시인은 지친 북한군 병사와 주막의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밤을 밝히며 ‘하염없는 얘기를 나누었다’. 서로 적의는 없었다. 북에서 고급 중학교에 다니다 강제로 끌려나왔다는 그에게 “북이 쳐 내려오니 남으로 달아나는 길”이라고 속엣 이야기를 털어놓을 정도로 서로 경계 없이 허심탄회한 대화가 오갔다. 서로 쳐다보며 피식 웃었을 뿐이었고, 그도 “이놈의 전쟁 언제나 끝나지. 빨리 끝나야 고향엘 갈 텐데.”라며 전쟁의 향방은 아랑곳없이 오로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만 가득했다. 도무지 이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서로 연민하는 가운데 전장에서 꽃피운 순수한 우정이었다. 문단에서 ‘마지막 휴머니스트’로 불렸던 강민 시인은 작고하기 직전까지도 그때 일을 오롯이 떠올리며 그 북한군 병사를 궁금해 했다. 그도 나처럼 그날 밤을 기억하고 떠올릴 때도 있을까 내내 궁금했던 것이다. 어쩌면 인생의 꽃도 피우기 전에 전장에서 뼈를 묻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소망은 어디서 날고 있나’ 통일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으나, 이제 저 하늘에서 ‘경안리’ 친구와도 재회하고 먼저 가신 부인과 그리운 친구들과도 다시 만나 긴긴 회포를 풀 것이다.

어쩌면 강민 시인이 ‘경안리에서’ 만난 북한병사는 씻겨놓으면 정해인 처럼 귀여운 꽃미남일지도 모른다. 강민 시인처럼 맑은 모습의 로맨티스트로 살다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오랜 외로움의 해원이 이제야 풀려 ‘새벽별처럼 총총하던 그의 눈길’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못 다한 우정을 나누고 남과 북의 동질성도 비로소 회복되었으리라. 강민 시인의 생전 그 염원이 이 지상에서도 이뤄지길 간절히 바란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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