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싸움/ 권기호

투전꾼의 개싸움을 본 일이 있다/ 한 쪽이 비명 질러 꼬리 감으면/ 승부가 끝나는 내기였다/ 도사견은 도사견끼리 상대 시키지만/ 서로 다른 종들끼리 싸움 붙이기도 한다/ 급소 찾아 사력 다해 눈도 찢어지기도 하는데/ 절대로 상대의 생식 급소는 물지 않는다/ 고통 속 그것이 코앞에 놓여 있어도/ 건들이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개들이 지닌 어떤 규범 같은 것을 보고/심한 혼란에 사로 잡혔다// 이건 개싸움이 아니다/ 개싸움은 개싸움다워야 한다/ 개싸움에 무슨 룰이 있고 생명 존엄의 틀이 있단 말인가/ 나는 느닷없는 배신감에 얼굴이 붉어왔다

- 시집『원로문인작품집』(대구문인협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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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피오줌으로 얼룩진 바닥밖에 기억나지 않지만 40년 전 투견을 딱 한번 구경한 일이 있다. 현재는 모텔로 바뀐 대구동촌유원지 야외수영장 특설무대에서였다. 인류 역사의 오랜 기간 세계 도처에서 행해졌던 투견 경기는 현재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동물학대로 간주하여 법으로 금지시키고 있다. 하지만 도사견의 원산지인 일본은 여전히 투견이 행해지고 있다. 과거 사무라이들을 달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개싸움을 붙였던 것이다.

시에서 이 희한한 싸움의 룰이 동물생태학적으로 검증된 진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만약 사실이라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타의에 의해 서로 으르렁대며 싸움은 하지만 데스 매치 상태에서 치명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상호 묵시적 담합이 존재한다는 뜻 아닌가. 개싸움은 당연히 개판이 되어야 마땅하거늘 이 무슨 당치않은 개뼈다귀 같은 수작인가. ‘절대로 상대의 생식 급소는 물지 않는’다니 말이다. 마지막 보루, 최종의 밑천은 서로 존중해주어 거들내지 않겠다는 인간들에게도 쉽지 않은 신사협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를 목격한 시인은 ‘심한 혼란에 사로잡히고’ ‘배신감에 얼굴이 붉어’졌다지만 이런 ‘개판’보다 못한 인간사도 버젓이 존재하기에 적이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무자비한 싸움은 때로 상상을 초월한다. 수단방법 안 가리고 갈 데까지 간다. 목숨이 간당간당한 사람을 짓밟는가하면 느닷없이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룰이나 규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생식급소 아니라 그보다 더한 거라도 이기기 위해서는 물고 늘어지고 감춰진 아킬레스근도 용케 찾아내어 물어뜯고야 만다.

이러한 싸움에 가장 능숙한 사람들이 정치인일 것이다. 정치인뿐 아니라 많이 배우고 가지고 누리는 위치에 있을수록 그런 경향이 농후하다. 그들의 명예욕이나 권력 욕구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강도가 세다. 그 과정에서 발현되는 위선과 기만, 그리고 탐욕은 그들 개인의 도덕성 문제만이 아니다. 상류층 혹은 지도층이라고 부르는 우리 사회 지배계급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문화양태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싸움은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익집단이나 진영 간의 사활이 걸렸을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치닫는다.

진영 논리의 틀 안에 갇혀 내 편의 허물도 허물로 인정하지 못하고, 내 편의 지나친 억측이고 생트집이라도 말릴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양측 모두 밀리면 끝장이라는 각오로 상대의 급소를 찾아 으르렁댄다. 이럴 때 이성적 사고의 입지는 매우 좁혀질 수밖에 없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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