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집 교촌은 독입운동가와 밀정 드나드는 주무대, 일제의 감시 눈초리 삼엄



▲ 최부자의 왕성한 교류를 입증하는 4천여 통의 편지가 담긴 상자.(사진 오세윤 작가)
▲ 최부자의 왕성한 교류를 입증하는 4천여 통의 편지가 담긴 상자.(사진 오세윤 작가)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본사를 부산에 두고 서울, 원산에까지 지부를 둬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거점 역할을 했다. 최부자집 창고의 서류들은 해방 이후 김구 선생의 이야기로 전해지는 “임시정부의 지원금 6할은 백산에서 나왔다”라는 말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경북도 경찰책임자가 1919년 10월20일자로 경주 최부자 최준에게 독립운동에 가담해서는 안된다는 자제 경고문을 보내온 문서가 최부자집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조선식산은행 부산지점으로부터 35만 원을 대출하기 위해 1922년 2월14일자 체결한 근저당권설정계약서. 설정된 부동산은 경주의 710건과 울산의 62건, 전답 66만 평으로 여의도 면적의 3/4에 해당하는 규모다.(사진 제공 오세윤 작가)
▲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조선식산은행 부산지점으로부터 35만 원을 대출하기 위해 1922년 2월14일자 체결한 근저당권설정계약서. 설정된 부동산은 경주의 710건과 울산의 62건, 전답 66만 평으로 여의도 면적의 3/4에 해당하는 규모다.(사진 제공 오세윤 작가)
백산무역주식회사(이하 백산)는 1919년 영남지역의 대지주들이 대거 출자해 당시 조선인의 자본으로 설립한 거대기업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백산은 최준이 사장을 맡고, 안희제, 윤상은 등이 임원으로 참여했다. 임원 대부분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인사들로 백산은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로도 볼 수 있다.



백산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초기부터 경비를 조달하는 데 기여하면서 부실이 가속화 했다. 최준은 부친 최현식과 1921년 만석꾼의 재산 대부분을 담보로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35만 원을 대출받아 투입했지만 백산은 결국 1928년 130만 원의 부도를 내면서 파산했다.

▲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상당히 발전적인 현대식 대차대조표. 당기순손실이 3만4천 원으로 나타난다. 독립운동 자금 지원의 결과로 추정된다.
▲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상당히 발전적인 현대식 대차대조표. 당기순손실이 3만4천 원으로 나타난다. 독립운동 자금 지원의 결과로 추정된다.


백산의 현대식 대차대조표와 영업보고서는 깨끗하게 남아 경제학계의 연구자료로도 가치가 높다. 백산의 운영 과정을 밝히는 대차대조표는 현대식으로 작성됐다. 1919년 11월6일 현재 합계잔액시산표를 보면 자산 131만9천 원에 불입자본금 25만 원, 부채 110만3천 원, 당기순손실이 3만4천 원으로 나타난다. 불입자본금 규모에 비해 부채와 손실이 크게 발생한 것은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 지원의 결과로 추정된다.



▲ 세금이 실린 우편마차를 습격한 사건이 실린 매일신보. 최준이 박상진에게 정보를 제공해 거사가 진행됐다.
▲ 세금이 실린 우편마차를 습격한 사건이 실린 매일신보. 최준이 박상진에게 정보를 제공해 거사가 진행됐다.
일제가 경주, 영덕, 영일 일대에서 거둔 8천700원의 세금을 우편마차로 경주에서 대구로 수송하던 도중 1915년 12월24일 소태고개에서 탈취당한 사건이 매일신보에 실렸다. 대한평복회 재무부장 최준이 총사령 박상진에게 첩보를 제공해 지휘장 권영만, 우재룡이 거사했다. 자금 관리는 최준이 맡았다. 일제강점기 내내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 박상진이 최준에게 자금 융통과 대구은행에 대출 상한가를 높여줄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
▲ 박상진이 최준에게 자금 융통과 대구은행에 대출 상한가를 높여줄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 독립운동 거점인 상덕태상회의 자금 회전을 위해 대한광복회 재무부장 최준에게 20편의 대구은행 어음 융통과 5천 원 한도 상향 조정을 부탁하는 편지다. 대구은행 발기인이자 대주주인 최준이 대구은행 지배인 윤정하 등에게 편지를 써서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 경북도 일제 경찰책임자가 최준에게 독립운동에 협조하면 안된다는 자제를 요청하는 한편 경고하는 공문.
▲ 경북도 일제 경찰책임자가 최준에게 독립운동에 협조하면 안된다는 자제를 요청하는 한편 경고하는 공문.
일제 경찰책임자인 경상북도 제3부장이 1919년 10월20일 경주 최부자 최준에게 독립운동 자제를 촉구하는 자제 경고문을 보냈다.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은 불온한 유언비어이자 망상이라며 소요에 가담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면서 임시정부 또는 과격단의 요구에 협조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하는 내용을 담았다.

▲ 최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최준에게 건강을 염려하면서 보낸 편지. 수신주소가 감옥으로 나타나 있다.
▲ 최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최준에게 건강을 염려하면서 보낸 편지. 수신주소가 감옥으로 나타나 있다.
대한광복회는 친일파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벌이는 한편 전국 부호들에게 의연금 모집 통고문을 발송했다. 긴장한 일제가 1918년 1월 충청도 지부원들을 시작으로 대한광복회의 조직원 검거에 나섰다. 재무부장 최준도 체포되어 공주헌병대에서 수사를 받은 뒤 공주 감옥에 수감됐다. 최준의 동생 최윤이 형을 면회한 뒤 1918년 6월13일 공주여관에서 감옥으로 부친 편지다. 옥고를 치르고 있는 형의 건강을 염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윤은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형을 대신해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 일본 외무성에 보관되고 있는 일제 밀정의 보고서. 최준이 현금 2만원을 들고 상하이에 입성했다는 내용. 당시 임시정부의 1년 지출금액이 6만 원 정도였다.
▲ 일본 외무성에 보관되고 있는 일제 밀정의 보고서. 최준이 현금 2만원을 들고 상하이에 입성했다는 내용. 당시 임시정부의 1년 지출금액이 6만 원 정도였다.
중국 상하이에서 암약하던 일제 밀정이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동향, 3.1운동 초기 상하이 임시정부에 쏟아진 국내외 동포들의 성원을 짐작하게 하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보관되고 있는 보고서. 임시정부의 연간 총지출이 6만2천350원인 당시 최준이 현금 2만 원을 들고 동생 최완을 만나러 상하이에 나타났다. 최완은 임시정부 재무부 위원으로 독립자금 조성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최부자 일가가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 상당히 기여했다는 내용을 입증하고 있다.



한편 창고에서 보관되고 있는 4천여 통의 편지글과 엽서, 명함들이 최부자의 인맥을 상상하게 한다. 최부자의 사랑채에는 독립운동가들 뿐 아니라 친일파들의 출입도 잦았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가 왕세자 때에 머물기도 했고, 의친왕과 덕혜옹주도 방문했다. 명사들의 사교장이었다. 일제가 노골적으로 탄압할 수 없었다. 경찰을 동원해 일상적인 감시를 펼치면서 항일세력과의 연계를 차단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펼치기도 했던 곳이다.



의병장 신돌석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장기간 최부자집 식객으로 은신했다. 대한광복회 우편마차 습격을 모의하고, 탈취한 세금을 은닉한 장소도 최부자집 사랑방이었다.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산실도 교촌이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경의 감시를 피해 교촌으로 숨어들었고, 비밀리에 자금을 전달받았던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최부자는 대를 이어 사회적 책무를 중하게 생각했다. 11대 최현식은 경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다. 12대 최준은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맡아 전 재산을 담보로 독립운동자금을 조성하는데 기여했다. 최준의 둘째아우 최완은 임시정부 재무부 위원으로 일했는데 일제에 체포됐다가 석방 직후 순국했다. 셋째 아우 최순은 백산무역의 상무를 맡아 독립자금 조달에 힘썼다. 해방 후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에 암살당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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