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시기 조정, 백산무역주식회사 일본은행에 독립자금 융자 서류, 독립운동가와 주고



▲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일제강점기 전후의 보물급 문서 수만건이 쏟아져 나왔다.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이사가 문서가 출토된 궤짝을 열어보고 있다.
▲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일제강점기 전후의 보물급 문서 수만건이 쏟아져 나왔다.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이사가 문서가 출토된 궤짝을 열어보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의 출발 시기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빨랐던 것으로 보여지는 서책과 경주 최부자집이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독립운동자금 지원에 깊숙히 관련된 각종 문서 등이 대거 발견됐다.

일본 수출규제로 인한 한일갈등과 74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조선시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이같은 내용을 포함한 문화재급 역사적인 자료 수만 건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이하 최부자선양회)는 1972년 최부자집 사랑채에 불이 나자 긴급히 옮겨 두었던 자료들을 창고에서 발견, 중요 문서로 확인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과 한문학과 교수 등에 의뢰해 번역작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부자집 창고에서 나온 서책들은 국채보상운동, 백산무역주식회사 설립, 독립운동 과정 등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추정할 수 있는 다양한 서책들로 보물급이라는 분석이다.



이 문서들은 하나 같이 역사적인 사실들을 고스란히 증명하면서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를 새로 고쳐쓰게 할 내용들도 있어 충격적이다.



▲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일제강점기 전후의 보물급 문서 수만건이 쏟아져 나왔다. 조선시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최부자집.
▲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일제강점기 전후의 보물급 문서 수만건이 쏟아져 나왔다. 조선시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최부자집.


특히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돼 지금까지는 대구의 서상돈 선생이 1907년 1월29일 운동을 발의한 것이 정설로 돼 있었다.

하지만 경주의 이 자료에는 1907년 1월22일자 의연금 영수증과 대구본부로 보고한 문서가 있어 국채보상운동의 시작 시기를 조정하게 한다.



자료에는 경주에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5천86명의 이름과 기탁금액까지 기록하고 있어 경주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던 것을 설명한다.



또 백산무역주식회사 설립 자료와 최부자집의 전 재산을 담보로 35만 원을 일본 식산은행에 차용하는 근저당설정계약서 문서가 깨끗한 활자로 남아있다.



백산무역주식회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지원했다고 증명하는 편지와 엽서, 일본 정부의 내부 보고서 등의 서류들도 함께 발견됐다.



▲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일제강점기 전후의 보물급 문서 수만건이 쏟아져 나왔다. 최부자집 전재산을 담보로 일본의 식산은행에 독립자금 35만 원을 융자받기 위한 근저당권설정계약서.
▲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일제강점기 전후의 보물급 문서 수만건이 쏟아져 나왔다. 최부자집 전재산을 담보로 일본의 식산은행에 독립자금 35만 원을 융자받기 위한 근저당권설정계약서.


독립운동가 박상진, 일본 황궁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 김지섭, 조선 최고 문장가 김매순, 실학가 서유구 등의 편지를 통해 최부자집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는 내용을 짐작하게 한다.



최부자집이 동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덕목 6훈을 이해하게 하는 기록들도 대거 발견됐다.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는 내용의 조선시대 과거 시험지, 과객을 후하게 접대하라는 ‘과객도기’ 기록,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을 없게 하라를 실천한 ‘구휼기’와 ‘기구성책’은 어려운 사람들의 명단과 곡식을 지급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일제강점기 전후의 보물급 문서 수만건이 쏟아져 나왔다. 최준과 최현식이 공동으로 백산주식회사 대표로 식산은행과의 근저당권설정계약서 마지막장.
▲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일제강점기 전후의 보물급 문서 수만건이 쏟아져 나왔다. 최준과 최현식이 공동으로 백산주식회사 대표로 식산은행과의 근저당권설정계약서 마지막장.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 김동리의 형 김범부, 안동의 권오설 등의 유명 인사들에 대한 장학지원 자료, 만석꾼 집안의 200년에 이르는 추수기를 기록한 250권의 서책, 조선시대 판서, 총리 등의 인물들과 교류한 흔적이 나타나는 1910년 전후의 편지 4천여 통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이외에도 일제강점기 당시 기록들도 다양하다. 최부자집에서 1911년에 월성초등학교를 설립했다는 문서는 현재 1927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학교 설립역사를 고치게 한다.



경남일보 창간호,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 기록 신문(만세보 1910년 2월16일자), 오세창의 민족신문 대한민보에 실린 최초의 신문삽화 등의 희귀한 자료들도 많다.



사단법인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이사는 “말로만 듣던 선조들의 행적들이 깨알같이 선명한 인쇄체로 남아있는 자료들을 대하니 가슴이 먹먹하다”면서 “이해할 수 있게 번역작업을 서둘러 후세에 길이 전할 수 있는 교육적 자료로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 일간신문 지상에는 보도된 적은 없다”면서 “귀중한 자료를 국립경주박물관 수장고에 우선 보관을 의뢰하고, 번역에 따라 차츰 문화재 등록 절차 등을 밟을 계획”이라고 전했다.



본지는 최부자집 창고에서 발견된 서책을 국채보상운동, 백산무역주식회사, 최부자집의 6훈, 일제강점기 기록들 등의 특집 4회로 연재하면서 소개할 예정이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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