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 서안나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 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게으르게 손톱 발

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햇살에 다친 무

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중략)/ 삼천 권 고서

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

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이 다 젖었다



- 시집 『립스틱 발달사』 (천년의시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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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풍속화 '월하정인(月下情人)'에는 쓰개치마로 반쯤 얼굴을 가린 여인과 넓은 갓

에 중치막을 입은 사내가 초승달 아래서 밀회를 즐긴다.

이 그림 제목은 ‘깊은 달밤 3경에 두 사람의 마음 그들만이 알리라’이다.

이 시에서도 남녀상열지사의 애절한 사랑과 안타까운 곡절이 슬며시 엿보이는데

소상한 사연은 알지 못한다.

은유가 깊어 더는 넘겨 짚지 못해 그들 심사는 그들만이 아는 것으로 내버려둬야겠다.

서원에서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학인의 몸으로 멀리 있는 정인을 그리워하는 심사가 애틋하다.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이런 무더위에

그늘을 찾아 몸을 옮겨 앉는 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랴. 서원의 둘레에서 물

도리동을 휘감아 흐르는 하회를 통해서도 회자정리와 엇박자의 이치를 깨닫는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 나갈

수 없다” 몹시 아쉽고 안타깝지만 당연한 노릇이다. 이제 와서 공부를 팽개칠 칠 수는 없

지 않은가. 세월이 너무 흘러 기다려줄 리 만무겠으나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수습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

다”

병산서원은 배롱나무로 유명하다.

지금쯤 목백일홍 꽃이 활짝 펴 분홍빛 장관을 연출하고 있겠다. 얼마 전 한 절집에서 백일

홍이 만개한 모습을 보았지만 예부터 배롱나무는 사찰이나 선비들의 공간에 많이 심었다.

이는 배롱나무가 껍질을 다 벗어버리듯 스님들도 세속을 벗어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선비들의 거처 앞에 심는 이유도 청렴을 상징하기 때문이란다. 원추꽃차례로 뭉클뭉클 피

어댄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과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

의 문장들”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만대루 7폭 병풍으로 펼쳐진 여름 화산과 흐르는 강,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그 밑에다 묻어주고 싶은. 뜨거운 해를 온몸으로 받으며 배롱나무 속은 얼마나 비우고 비

웠을까.

가끔 소나기 몰려와 닦고 가면서 수피는 또 얼마만큼 매끄러워졌을까.

그래서 한 생애 얼마나 깊고 넓어야 거기 분홍으로 가득할까.

피보다 진한 붉은 빛이 저리 처연하게 고울까.

오래 전 겉치레 없이 알몸으로 서 있는 목백일홍의 가식 없는 아름다움에 깊이 빠졌던 삽

상한 기억이 이 여름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다.

나를 둘러싼 수많은 껍데기들을 벗겨내고 나면 나도 저처럼 떳떳하게 붉을 수 있을까.

하심의 문장들이 써질까.



이동현 기자 leed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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