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의자 / 문인수

장맛비 속에, 수성못 유원지 도로가에, 삼초식당 천막 안에, 흰 플라스틱 의자 하나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있다. 뼈만 남아 덜거덕거리던 소리도 비에 씻겼는지 없다. 부산하게 끌려 다니지 않으니, 앙상한 다리 네 개가 이제 또렷하게 보인다.// 털도 없고 짖지도 않는 저 의자, 꼬리치며 펄쩍 뛰어오르거나 슬슬 기지도 않는 저 의자, 오히려 잠잠 백합 핀 것 같다. 오랜 충복을 부를 때처럼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은 저 의자, 속을 다 파낸 걸까,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 않는다.// 상당기간 실로 모처럼 편안한, 등받이며 팔걸이가 있는 저 의자, 여름의 엉덩일까, 꽉 찬 먹구름이 무지근하게 내 마음을 자꾸 뭉게뭉게 뭉갠다. 생활이 그렇다. 나도 요즘 휴가에 대해 이런 저런 궁리 중이다. 이 몸 요가처럼 비틀어 날개를 펼쳐낸 저 의자,// 젖어도 젖을 일 없는 전문가, 의자가 쉬고 있다.

- 시집 『배꼽』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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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를 소재로 쓴 시는 많다. 그만큼 의자가 상징하는 바가 적지 않아 관찰과 사유의 응시도 붐볐겠다. 시인이 보았던 식당 의자는 야외용 간이의자다. 보송보송한 햇빛이 내려앉은 해변이나 너른 평수의 잔디밭, 물빛 고운 수영장 같은 장소와 잘 어울리며, 실제로 그런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벼운 플라스틱 의자다. 그러나 수성유원지 삼초식당 의자는 돼지창자를 구워 파는 막창집이거나 정구지 부침개가 주 메뉴인 천막식당의 간이의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식당의자는 아무런 계급이 없다. 누구나 먼저 엉덩이를 들이대기만 하면 임자다. 한때 덜거덕거리며 부산하게 끌려 다녔던 이력은 이제 오간 데 없다. 장마 때문만은 아니다. 속을 다 파내고 뼈만 남아 앙상한 네 다리가 비로소 또렷하게 보인다. 장마기간 몇날 며칠 비를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도 않는다. 오래된 충복 같기도 하고 인도의 요가승 같기도 한 그 의자에게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젖어도 젖을 일 없는 전문가’란 별칭이 조용히 씻긴 굿 한 마당 위에 내려앉는다.

플라스틱 성형으로 단순하게 찍어낸 저 식당의자를 저토록 환한 여백의 결 무늬로 다시 찍어내다니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관찰이며 사유의 깊이가 아닐 수 없다. 장맛비 속에서 한곳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머릿속에 스치는 변화무쌍한 생각들과 잘 놀아나지 못했다면 이런 시는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시적 사유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시는 어림도 없었으리라. 시퍼렇게 날선 시선과 스스로 요가 수행승의 몸처럼 숭고한 동작을 복제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이런 시는 아마 태어나기 어려웠으리라.

사람이란 본디 계속 서있으면 앉고 싶고, 퍼질러 앉으면 눕고 싶고, 장 누워있으면 좀이 쑤셔 그만 일어서 걷고 싶다. 그 비틀림의 과정에서 가장 유용한 도구가 의자다. 어떤 의자든, 비록 병원의 휠체어이든 무엇이든 간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있어 최소한의 축복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혼자 맘대로 풀썩 앉고 벌떡 일어서고 싶을 때 냉큼 의자에서 몸을 빼내는 일이 버거운 사람이 있다. ‘요가처럼 비틀어 날개를 펼쳐내’는 역동작의 전문가도 그렇다. 장마가 끝물이다. ‘나도 요즘 휴가에 대해 이런 저런 궁리 중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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