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태종 춘추공(상)||김춘추와 김인문의 대를 이은 당나라 교섭으로 군사 지원 유도,



▲ 태종 무열왕은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는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했다. 무열왕릉은 삼국유사의 기록은 물론 그의 아들 김인문이 쓴 비석의 머릿돌에 남은 글씨가 남아있어 확실하다. 경주 서악동에 위치해 있다.
▲ 태종 무열왕은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는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했다. 무열왕릉은 삼국유사의 기록은 물론 그의 아들 김인문이 쓴 비석의 머릿돌에 남은 글씨가 남아있어 확실하다. 경주 서악동에 위치해 있다.


신라 천 년의 역사 가운데 획기적인 전환점이라면 신라의 삼국통일이다. 신라 삼국통일의 기반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마련했다. 김유신 장군과 손잡고 전장을 누빈 것이 삼국통일을 달성한 기초가 되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짜는 데는 정보가 중요하다.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의 정보를 확보하는 데는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을 가장 앞자리에 둔다.



신라 삼국통일은 당나라의 힘을 빌어 이룩할 수 있었다. 당나라의 군사를 움직이는데 김춘추와 김인문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김춘추는 당 태종과 고종이 인재를 아끼며 중용하는 마음을 간파했다. 또한 태종의 후궁이자 고종의 왕후 자리를 꿰차고 정치에 직접 관여했던 측천무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당나라의 도움을 받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이용해 큰아들 법민은 신라에 남겨두고 지혜로운 인문을 당나라에 볼모로 맡겨두듯 하면서 정보를 얻어내고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 무열왕릉은 귀부와 뒤편 산자락으로 나란히 배치된 4기의 고분, 울창한 소나무숲 등으로 공원을 조성해 관광객들이 줄을 이어 탐방하는 코스다. 공원 정문 건무문이다.
▲ 무열왕릉은 귀부와 뒤편 산자락으로 나란히 배치된 4기의 고분, 울창한 소나무숲 등으로 공원을 조성해 관광객들이 줄을 이어 탐방하는 코스다. 공원 정문 건무문이다.


삼국유사는 태종 김춘추조를 길게 늘여 썼다. 이 때문에 김춘추에 대한 이야기는 세 단락으로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또 삼국유사의 내용은 간편하게 요약해 기록하기로 한다.



▲ 무열왕릉 공원에는 요즘 백일홍이 한창이다.
▲ 무열왕릉 공원에는 요즘 백일홍이 한창이다.


◆삼국유사: 김춘추〈1〉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의 이름은 춘추이다. 아버지는 진지왕의 아들 용수(용춘이라고도 한다)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이다. 왕비는 김유신의 막내 여동생 문명왕후 문희다.



▲ 무열왕릉 뒤에는 문희연못으로 불리는 작은 연못이 있다. 못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연꽃과 산책로 주변에 코스모스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 무열왕릉 뒤에는 문희연못으로 불리는 작은 연못이 있다. 못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연꽃과 산책로 주변에 코스모스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전해지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문희의 언니인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 오줌을 누었더니, 오줌이 서울에 가득찼다. 다음 날 아침 그 꿈을 동생이 비단치마를 주고 샀다.



열흘 뒤에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유신의 집 앞에서 공을 찼다. 유신이 일부러 춘추의 옷을 밟아 옷고름을 떨어뜨리고는 “우리 집에 들어가 꿰맵시다”라 하니 춘추가 이에 따랐다. 유신의 동생 문희가 춘추의 옷고름을 꿰매어주면서 둘이 정을 통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춘추공이 문희와 혼례를 올려 문희는 후일 왕비가 되었다. 진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춘추공이 왕위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되는 용삭 원년 신유(661)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59세였다. 애공사 동쪽에 장사지냈는데 비석이 있다.



왕은 유신과 함께 신비스런 지략과 전력을 다해 삼한을 통일하여 나라에 큰 공로를 세워서 묘호를 태종이라 했다. 태자 법민과 각간 인문, 각간 문왕, 각간 노차, 각간 지경, 각간 개원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이다. 서자는 개지문 급간, 거득영공, 마득아간이라 했는데 딸까지 합하여 모두 다섯명이다.



▲ 무열왕릉 공원 입구에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의 꿈이야기와 김춘추의 활약을 만화로 그린 안내판이 서 있다.
▲ 무열왕릉 공원 입구에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의 꿈이야기와 김춘추의 활약을 만화로 그린 안내판이 서 있다.


춘추공이 군사를 요청하러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나라 황제가 그의 풍채를 아름답게 여겨 신성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이어 춘추공을 당에 머물게 하여 시위로 삼으려 했으나 간청하여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는 바로 무왕의 맏아들로 굳세고 용맹하며 담력이 있었다.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도 우애가 있었으므로 당시에 해동의 증자라고 불리었다. 그는 왕위에 즉위하자 술과 계집에 빠져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나라는 위태롭게 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춘추의 계략

김춘추는 외모가 여성스럽게 넉넉하면서도 남성미가 넘쳤다. 부드럽게 생겼지만 무예가 출중하여 전쟁에서는 은연중 상대방 장수들이 그를 무시하다 낭패를 당했다.



특히 김춘추의 장점은 문장이 뛰어나고 언변이 훌륭하다는 것이다. 거기에 남다른 집념이 강해 한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이루어야 했다.



▲ 신라 56대 왕들의 무덤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위치를 입증하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거북의 형상과 몸돌은 없어졌지만, 용이 새겨진 이수가 신라시대 최초의 형식으로 세워졌다.
▲ 신라 56대 왕들의 무덤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위치를 입증하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거북의 형상과 몸돌은 없어졌지만, 용이 새겨진 이수가 신라시대 최초의 형식으로 세워졌다.


춘추공의 딸과 사위가 백제군에 죽임을 당했다. 춘추는 기둥을 잡고 사흘 밤낮을 피눈물을 흘리면서 백제에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이를 계기로 춘추공은 신라의 대신을 자처하여 고구려와 왜나라에까지 직접 백제를 공격할 군사를 얻으러 갔다. 그러나 오히려 책망만 듣고 실패하고 돌아왔다. 고구려에서는 그를 잡아 가두고 억류했다. 이때 김유신이 목숨을 걸고 달려가 그를 구해 내면서 둘의 관계는 한층 더 끈끈하게 발전했다.



춘추공의 집념은 그를 당나라로 향하게 했다. 당 태종 때였다. 태종이 고구려와의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의 화살을 눈에 맞고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 후궁 측천무후가 정치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었다. 당시 측천무후는 20대 초반이었지만, 정치적인 야욕으로 남성들을 요리조리 마음껏 휘둘렀다.



▲ 태종 무열왕릉 고분공원의 산책로.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 태종 무열왕릉 고분공원의 산책로.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김춘추는 당나라의 황실 내부 사정을 간파하고, 당에 머무는 짧은 시간에 태종에게 정치적인 계약을 하는 한편, 황금을 들고 측천무후를 직접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측천무후는 신라의 훤칠한 아름다운 장수의 외모와 현란한 말솜씨에 한 눈에 반해버렸다. 그다음부터 춘추공의 협약은 순풍에 돛을 달았다. 망설이던 태종이 30만 대군의 병력지원을 약속하며 백제는 물론 고구려까지 물리치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함께 돕겠다고 언약했다.



그러나 세상사는 그렇게 순조롭게만 않았다. 당 태종이 병마에 시달리는 동안 그의 아홉 아들이 황제의 자리를 두고 혈투를 벌였다. 태종 이세민의 큰아들 이승건이 태자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그가 먼저 죽고 넷째 이태가 왕위를 잇기로 했다.



태종의 후궁 측천무후가 아홉 번째 아들 이치에게 붙었다. 소극적인 이치에게 왕씨 부인이 있었지만, 태종의 병실을 드나드는 그를 측천무후가 침실로 불러들여 한통속이 되어버렸다. 결국 측천무후가 자신의 야욕을 위해 이치를 꼬드겼다. 소극적이던 이치가 측천무후의 지원을 받아 넷째 형을 누르고 황좌에 올랐다.



측천무후는 왕씨를 폐위토록 하고, 그의 측근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측천무후의 세상이 도래했다. 중국 200여 명의 황제 중에서 유일하게 여성으로 황제에 등극하는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혼란 틈에 신라의 전쟁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 무열왕릉 남쪽 300여m 지점에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묘와 비석받침이 있다. 무열왕의 비석받침과 비슷한 형식으로 살아있는 듯한 조각으로 새겼지만 예술성은 다소 뒤떨어진다.
▲ 무열왕릉 남쪽 300여m 지점에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묘와 비석받침이 있다. 무열왕의 비석받침과 비슷한 형식으로 살아있는 듯한 조각으로 새겼지만 예술성은 다소 뒤떨어진다.


춘추공은 성년이 된 둘째 아들 김인문을 당나라 사신으로 파견했다. 인문은 춘추공과 문희의 장점을 그대로 빼닮아 훤칠한 외모에 무술 실력을 갖춘 뛰어난 지략가로 성장했다. 누구보다 눈치가 빠르고 아버지 춘추공의 생각을 잘 알았다.



당 고종이 즉위하고 측천무후의 정치적 욕심을 간파하고 있던 춘추는 인문에게 측천무후를 공략할 방법을 미리 귀뜸해 보냈다.



▲ 춘추공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묘. 아버지 태종무열왕릉 남쪽에 큰 장식 없이 고분으로 남아있다.
▲ 춘추공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묘. 아버지 태종무열왕릉 남쪽에 큰 장식 없이 고분으로 남아있다.


춘추공을 빼다 박은 젊은 신라의 장수 김인문을 마주한 측천무후는 신라의 선물보다 인문의 외모에 더욱 빠져들었다. 인문의 외모가 측천무후의 눈에 들면서 인문은 당나라에서 뼈를 묻어야 할 운명으로 진작 낙점되었다.



측천무후의 꼭두각시가 된 당의 고종 이치는 김인문에게 태종 때처럼 30만 대군의 지원과 백제, 고구려 공격을 약속했다. 김인문이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는 당나라군사의 선봉장이 되었지만, 측천무후의 부름으로 전쟁 중에 당으로 되돌아 가야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에 이르게 하고, 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한 배경에는 김춘추의 정치적 계략과 김유신 장군 등의 뛰어난 전술전략 외에도 측천무후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 무열왕릉 뒤편으로 높게 솟은 고분 4기가 능선을 따라 줄지어 있다. 산책로가 고분 주변으로 조성되어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다.
▲ 무열왕릉 뒤편으로 높게 솟은 고분 4기가 능선을 따라 줄지어 있다. 산책로가 고분 주변으로 조성되어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다.


춘추공을 지원하는 세력은 다방면에 있었다. 그를 직접 왕좌에 앉게 한 김유신 장군은 가장 큰 언덕이었다. 또 그의 장성한 아들들도 그를 지원하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다.



그와 결혼한 김유신의 동생 문희도 춘추의 전쟁과 정치적 행보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문희는 미색이 뛰어난 것은 물론 지혜로웠다.



하늘의 기운을 타고 태어난 유신과 함께 자라며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 세상 이치는 물론 전쟁의 전술에도 밝았다. 김춘추가 전쟁에 앞서 부인 문희와 상의하는 일이 잦았던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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