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대통령/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 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 (중략)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중략) 황톳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릿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월간문학’ 창간호 (196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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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문재인 대통령이 스웨덴 스톡홀름 의회 연설에서 이 시의 일부를 낭독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스웨덴은 한국인에게 오랫동안 이상적인 나라였다. 1968년, 한국이 전쟁의 상처 속에서 민주주의를 꿈꾸던 시절, 한국의 시인 신동엽은 스웨덴을 묘사한 시를 썼다”고 말한 뒤 시를 읽어 내려갔다. 스웨덴은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처럼 영세중립국은 아니지만 1, 2차 세계대전에서 굳건한 중립노선을 표방 유지하며 나치 독일의 침공을 면하였다. 일반중립국이 스웨덴처럼 안정적인 외교를 펼치기란 쉽지 않다.

이편도 저편도 아닌 중립을 선언하더라도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려면 외교능력도 좋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통치자의 정권야욕이 없어야 한다. 대통령이라고 뻐겨서는 절대 안 되고, 국민도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아무 지장 없어야 한다.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는 마음이 풍요로운 지도자가 낮은 자들을 섬기는 나라. ‘미사일 기지도 탱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는’ 신사적인 나라.

비굴한 상호방위조약 같은 것은 맺을 필요도 없는 나라. 전쟁과 무력사용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어리석은 짓인지 깨닫게 하는 나라.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정권을 거머쥐고자 허구한 날 바락바락 상대를 갈구고 물어뜯는 나라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꿈꾸지 못할 나라. 일찍이 우리도 그런 나라를 꿈꾸며 중립을 표방했던 적이 있다. 1885년 유길준은 ‘조선중립론’을 제안하면서 당시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을 피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당시 국력이 너무나 허약하였으므로 이 주장은 탄력을 받지 못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대한제국 고종도 중립 노선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서 일본의 조선 침탈이 시작되고 중립노선은 백지화되었다. 1960년 4·19 이후 신동엽은 시에서 ‘중립의 초례청’을 꿈꾸었다. 당시엔 북한도 조선의 자주화를 내세우며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남한에서도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란 구호가 횡행했다. 하지만 우리의 영세중립국과 ‘석양 대통령’은 다만 꿈이었고 열강들에겐 불온한 상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대로 불안한 한반도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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