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에서 친일파로, 새로운 전선



한국과 이웃나라 일본이 무역전을 벌이고 있다. 조국 민정수석이 연거푸 북을 두드려대며 독전에 앞장섰다. 무기고에서 동학 죽창이 나오고 서희와 이순신 장군도 불려 나왔다. 청와대가 정부를 젖히고 위험 부담을 떠안았다. 교수였던 그에게 국가 간 대결은, 그것도 상대가 일본일 때는 교과서처럼 나 자신부터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 같다. 아이가 밖에서 싸우고 들어오면 먼저 내 아이가 잘못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꾸짖은 후에 상대 아이의 잘못을 따지라고 배웠는데. 정치가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동원했던 사례는 세계사에서 차고 넘친다. 국내의 풀리지 않는 정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다. 국론을 통일하고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 국정을 이끌기 위해 전쟁이라는 도구를 동원한 것이다. 오백여 년 전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치러 간다며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라고 했다. 임진왜란이다. 도요토미가 번주들에게 더 이상 나눠줄 영지가 없어 조선 땅을 침범했다는 것은 다 아는 이야기다. 이번 한·일 간 무역 전쟁은 일본 아베 총리가 선제공격을 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지금 평화헌법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가 원하는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기 위해 새로운 카드가 필요했다. 그런데 마침 이웃 대한민국에서 일제강점기의 징용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가 대법원 판결로 확정된 것이 빌미를 준 것이다.일본으로서는 1965년 한일회담에서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합의를 했는데 다시 무슨 배상이냐며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위기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가 물러서지 않고 총력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그건 보상이었고 지금은 배상이라며,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는 기세다. 상대가 일본인데 자기를 돌아볼 이유도 여유도 없다. 서로 장군과 멍군을 주고받는 장기판을 만들었다. 1970년대 유신시대. 눈만 뜨면 ‘때려잡자 김일성’ 하고 냅다 주먹을 내지르며 악을 쓰고 나서야 일과가 시작되던 때였다. 잠자리에 들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우리 군인들은 ‘때려잡자 김일성’을 외쳐대야 했다.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것도 그즈음 이었다. 1972년 7월4일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이 성명은 남북한 당국이 국토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역사적인 공동성명이었다.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3대원칙을 천명한 공동성명은 잠시 국민들에게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통일에의 기대를 갖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의미는 남북한 실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 강화에 이용하려는 정치적 의도였음이 남한의 10월유신(1972년10월17)과 북한의 사회주의헌법 채택(1972년12)이 극명하게 보여줬다. 6·25 남침을 경험한 우리 민족은 10월유신 이후에도 오랫동안 북한의 미사일과 핵 위협에 노출돼 있었다. 북한의 위협은 민족의 생존에 직접 영향을 미쳤고 모든 개념의 최상위에 전쟁의 공포가 자리했다. 정치가 군사독재 정권을 민주정권으로 바꾼 뒤에도 우리는 북의 남침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 북의 핵 위협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과의 대치 전선에서 동참하지 않으면 내부의 적으로 몰려 빨갱이가 되어야 했다. 다행히 문재인 정권 들어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은 표면적으로 사라지면서 대북전선이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다. 이 틈새를 일본이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사실이 됐다. 지금 청와대가 앞장서고 여당이 돌격부대가 되어 국민을 선동하는 전쟁이 다르지 않다. 전선이 북한에서 일본으로 이동한 것이다. 우리끼리 비판하고 내부총질하거나 백태클 하면 X맨이 된다. 이 전선에서 이탈하면 친일파가 된다. 그렇다면 일본과 한국의 정치권이 모두 지지세 결집과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서로를 이용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언론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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