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옥수 신창원’, 그리고 교육



홍덕률

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인간은 학습하는 존재다. 물론 책이나 학교를 통해서만 배우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삶의 현장이 학교일 수 있고 누구나 교사일 수 있다. 하늘의 달과 별, 길가의 들풀과 돌멩이로부터도 훌륭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과거 비극적인 역사와 사건과 악인들을 통해서도 귀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 반면교사, 타산지석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공자도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 했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스승으로 받들만한 이가 있다’는 뜻이다.

오늘은 잠시 시간여행을 떠나려 한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아 20년 넘게 교도소에 격리되어 있는 한 중죄인을 만나기 위해서다. ‘탈옥수 신창원’이다.

꼭 20년 전, 1999년 7월16일의 일이었다. 무기수로 복역하다 탈옥했던 신창원이 다시 붙잡혔다. 1997년 1월에 탈옥했으니 2년 반 동안 도망자로 살았다. 고비마다 경찰을 따돌리는 신출귀몰한 도주로 유명세를 탔다.

재투옥되고 오늘까지 20년, 그 동안에도 그는 많은 화제를 낳았다. 먼저 중졸, 고졸 검정고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2004년의 일이었다. 복역중이던 대구교도소에서는 ‘신창원 따라하기’ 면학 열풍이 일기도 했다.

그가 처음 소년원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82년이었다. 죄목은 절도죄였다. 한 해전에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3개월 다니다 그만 두었다. 급우들로부터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해서였다.

비극은 이미 그 전부터 잉태되기 시작했다. 어려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간암이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어려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사실이다. 덧붙여 아버지의 훈육 태도는 결정적으로 그를 비뚤어지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경찰에게 아들 신창원을 구속 수감시켜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어린 신창원은 큰 충격에 빠졌고 돌이킬 수 없는 반항아의 길로 빠져들었다.

학교에서도 그는 정붙일 사람을 찾지 못했다. 따돌리고 괴롭히는 급우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세상에 적개심을 갖게 된 더 결정적인 계기는 선생님에게 있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주지 않은 것은 물론, 어이없는 비난으로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같은 놈이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 하고 머리 한번만 쓰다듬어 주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5학년 때 선생님이 ‘이 새끼야 돈 안가져 왔는데 뭐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 하고 소리쳤는데, 그 때부터 마음 속에 악마가 생겼다.”

참으로 슬프고 곤혹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부모와 학교, 선생님이 그를 범죄자로 악마로 만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어서다. 부모와 선생님의 태도와 말 한마디는 어린 아이를 위대한 성인으로 키워낼 수도 있지만, 범죄자로 악마로도 만들 수 있다.

감옥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그는 온라인을 통해서라도 대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했다.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싶어서였다. 감옥에서 만난 중범죄인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 다시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의 상처는 사랑으로밖에 치유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얼어붙은 가슴은 사랑만이 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도 마음이 열려야만 전달할 수 있는 거잖아요.”

날마다 범죄 뉴스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중에서도 가정폭력, 어린이집 유아폭행, 교실 왕따, 미성년 성폭행, 학교폭력 등이 더 걱정이다.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아동과 청소년 등 성장기 아이들이 정작 사랑은 받지 못한 채 비인격적인 멸시와 따돌림과 폭력에 노출되어 돌이킬 수 없는 탈선과 범죄의 길로 들어설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실은 가정과 학교, 부모와 선생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아프리카 속담 하나가 떠오른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의 노력이 필요하다.” 교육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요 사회의 과제라는 뜻이다.

20년 전 오늘, 탈옥수 신창원이 재검거될 때 입었던 쫄티의 알록달록한 무늬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미 악마로 변해버린 자신을 탄식하는 그를 떠올리며, 교육의 중요성과 교육자로서의 자세를 다시 곱씹게 된다. 교육은 ‘사랑’이다. ‘사랑’이야말로 가장 큰 교육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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