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의 수염/ 최영화

원성왕릉의 무인상 서역인이라는데/ 적당히 길러진 수염 누가 다듬었을까// 일행 중 하나 였을거야/ 서역인은 신라에 같이 올 때 일행 중 한명이/ 수염을 깎아 주었을 거야// 아니야,/ 신라의 한 여인네였을 거야/ 맞아 맞아 사랑하는 여인이 깎아 주었을 거야// (중략)/ 펴보면 도로 말리는/ 고집불통 수염/ 언젠간 돌아가야지/ 그 수염 아무리 펴도 돌아가는/ 평생 회족(回族)의 것이야// 그 여인 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다/ 활 들고 과녁장 사선대에 서/ 활시위 당겨 화살 날려 보내니/ 건너편 ‘관중이요’ 깃발 올라간다/ 날아간 화살 돌아오지 않는다

- 시집『처용의 수염』 (문학신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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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원성왕릉의 무인상’은 신라가 서역(중국의 서쪽 지역)과 직접 교류를 했으리란 추정을 가능케 하는 역사적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부리부리한 눈과 뚜렷한 이목구비, 풍성하고 곱슬곱슬한 수염의 무인상은 영락없이 서역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시 어떤 경로로 ‘회족’은 이역만리 신라 땅까지 들어왔을까. 7세기 통일신라는 당과의 교류를 강화하고 당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혜초를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장안에서 공부를 하였고, 서시에는 신라방을 개설하여 무역에도 힘을 쏟았다. 신라와 당의 활발한 교역은 상호교류를 증진시켜 장안에 들어와 있던 많은 외국인들이 신라로도 건너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에 온 그들이 제대로 적응은 하였을까? 무슬림은 ‘충의’를 중시하는 유가사상이 이슬람 교리와도 일맥상통하였으므로 거부감 없이 유가의 경전을 배우고 과거에도 응시하였을 것이다. 서역인 가운데는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사람도 있었으리라. 신라의 역사문헌에는 기록이 없지만, 무슬림 학자들이 기록한 문헌에는 신라시대에 이미 회족들이 들어와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9세기의 한 기록은 “중국의 맨 끝 광주의 맞은편에 산 많고 왕이 있는 나라 신라국이 있었다. 이 나라는 금이 많아 무슬림이 들어가면 그곳에서 정착해 살았다”고 하였다.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통일신라인들의 서역 문물에 대한 호기심은 대단했다. 삼국사기에는 귀족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도 앞 다투어 서역에서 들어온 호화물품들을 사들임으로써 무분별한 사치 풍조마저 일었다고 기록하였다. 서역인들이 경주로 유입된 경로는 당시 국제무역항이던 울산을 통해서일 것이다. 서역인은 울산의 <처용설화>에도 등장한다. 헌강왕을 따라 경주에 와서 벼슬을 하던 중 어느 날 밤, 아내를 범하려는 역신(疫神)에게 ‘처용가’를 지어 불렀더니 그 역신이 물러갔다고 하는 설화이다. 용의 아들 처용의 얼굴은 원성왕릉의 무인상처럼 매우 이국적이어서 페르시아 출신의 서역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한다.

반면, 무인상의 인물이 서역인이 아니라 불교의 금강역사상이라는 학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기록에 근거하지 않는 상상력으로 조합된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도 원성왕릉을 찾는 많은 방문객들이 그 상상력을 보태고 있으며 시인도 한몫 거들었다. ‘적당히 길러진 수염’은 ‘누가 다듬었을까’ 신라는 정말 페르시아사람들의 이상향이었을까. ‘언젠간 돌아가야지’ 고향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을까. 사랑하는 ‘신라의 한 여인네’가 있었고, 그 여인이 ‘수염을 깎아 주었을’ 것이라며 상상의 공간을 풍성하게 한다. 그러다가 ‘회족’의 본성으로 돌아간, ‘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며’ 활시위를 당기는 신라의 여인을 보듬는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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