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념 5분27초/ 황지우

- 시집『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문학과지성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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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를 위해 피아노 앞에 피아니스트가 앉아있고, 바이올린과 첼로 연주자가 박수를 받으며 무대 위로 올랐다. 그러나 그뿐, 무대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객석에서의 작은 술렁임이 유일한 소리였다. 음악당은 4분여 동안 침묵과 고요만이 흘렀다. 존 케이지가 1952년 작곡한 ‘4분33초’라는 곡은 그렇게 연주가 시작되고 끝이 났다. 연주자의 묵음에 내용 파악을 못한 일부 관객의 어리둥절함과 웅성거림, 그리고 묵상의 관객이 4분33초 동안 연출한 바로 그것이 케이지가 의도했던 음악이었는데, 오래 전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강마에’가 이 장면을 모사한 바 있다.

이 시도 시제목만 있을 뿐 아무런 내용이 없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아니 말을 할 수가 없었을 이 시는 제목 하나만으로 곧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가장 짧은 시이면서 동시에 가장 긴 시일수도 있다. 왜냐하면 제대로 시를 읽으려면 최소한 5분27초는 묵념에 임해야 하므로. ‘5분27초’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이 유혈 진압되어 모든 상황이 종료된 날인 5월27일에 그 무거운 은유가 걸려있다. 윤상원이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최후의 죽음을 맞이한 것도 5월27일 새벽이었다. 시는 윤상원 열사를 비롯해 그 과정에서 희생된 영령들에 대한 묵념을 주문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다른 자각증상 없이 그냥 훌쩍 지나갔을 5월27일. 어쩌면 이처럼 독특하고 기발난 시로써 시에서 제시한 것 이상을 사유토록 한 황지우 시인 자신조차 지난 39년간 이를 기억하고 매해 머리를 숙이지는 못했으리라. 39년 전 10일간의 역사를 단편적 기억이 아닌 함께 묶어 성찰로 인식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사실 5분27초 동안 가만 눈 감고 있기도 쉽지 않은데 애도와 자괴와 반성과 다짐의 시간으로 ‘묵념’이라니 수월할리 만무하다. 윤상원이 전사하기 하루 전날인 5월26일 밤 그와 마지막 인터뷰를 했던 ‘볼티모어 선’ 브래들리 마틴 기자의 증언을 듣는 것으로 그 묵념의 일부를 대체한다.

그는 1994년 월간 ‘샘이 깊은 물’에 기고한 글을 통해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내 눈을 봤고, 그는 나를 선택해 인터뷰를 했다. 나한테 남기는 마지막 유언 같았다.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이미 그(윤상원)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죽음은 항쟁의 참뜻을 후세 역사화의 밑거름이 되게 할 것‘이란 말을 남겼다.

이것이 윤상원 열사의 최후에 대한 마지막 증언이다. 역사의 굴렁쇠는 늘 당시의 기억을 바퀴에 묻힌 채 오늘을 향해 구르고 있다. 그 뒤로도 우리는 허무하게 쪽팔리게 판판이 깨지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최근 전방부대를 방문해 “군과 정부의 입장은 달라야 한다”는 황교안 대표의 말은 39년 전 그들 진압군에게나 돌려주었어야 마땅한 말이다. 지금이라도 당시 군의 처신에 대해 그리 말할 수 있다면 분별없고 위험한 발언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때 군이 항명하여 제 나라 제 국민을 지켰더라면 민주주의의 제단에 그토록 많은 피를 바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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