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진란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구름도, 바람도, 햇살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꽃도, 나무도, 별도 달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미움도, 원망도, 회한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사랑도, 미련도, 눈물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첫봄처럼 개나리봇짐을 메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타오르는 꽃불을 들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사람을 사랑한 사람들이/ 문을 열고 문을 통하여/ 손에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가네, 사람 사는 세상이네

- 시집『혼자 노는 숲』(나무아래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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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이승을 떠난 지 어느새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10년 전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노무현의 충격적인 죽음에 국민들은 펑펑 눈물을 쏟았지만 시간은 어떤 비통도 완화시키기 마련이다. 그 뜨거웠던 추모열기에 비하면 10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많이 차분해졌다. 그를 기리는 마음도 엷어질 수밖에 없겠으나 노무현의 가치가 절하되거나 그 정신이 퇴색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는 보이지 않기에 우리들에게 영원한 존재로 남아있으며, 보이지 않기에 눈에서 사라지지 않고 마음속에 살아 지워지지 않는다.

“꽃이 진 뒤에야 봄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언젠가 한 추모 광고에서 본 카피 문구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노무현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대통령 노무현’이라고 새겨진 너럭바위 비석 앞에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고 쓰여진 강판이 덮여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어록 가운데서도 가장 강렬한 어조로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새긴 것이다. 평생 반칙과 특권에 맞서 싸운 이력을 잘 함축한 말이다. 이 깨어있는 시민의식은 뒤이어 세상을 떠난 김대중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과도 일맥상통한다.

두 대통령의 이 유지는 한때 민주당이 내건 슬로건이었으며 강령과도 같다. 그런데 지금 민주진영 안에서 노무현정신이 얼마나 살아 숨 쉬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의 이름만을 팔거나 뒤에서 후광효과 정도나 누리려는 자들은 없는지 모르겠다. 지금이야말로 노무현 정신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다시 회복할 때이다. 아울러 노무현을 열렬히 흠모하고 받드는 사람들 역시 품위를 지켜가면서 원칙이 승리하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일이다. 능동적 참여 못지않게 도덕적 성숙이 중요하다. 성찰하고 또 성찰하면서 연대를 풀지 않아야 하리라.

천박한 욕설이 카타르시스는 될지언정 결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으며 노무현의 유지는 더욱 아니다.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는 부엉이바위 벼랑 끝에서 남긴, 그의 이타가 엿보이는 마지막 말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유시민 이사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인정 많고, 남 위에 서려는 욕망도 없는 분이었다. 자기 일도 아니지만 누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걸 보면 못 참아서 함께 화를 냈다”고 회고했다. 그는 자주 핏대를 내는 사람으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너그럽고 품이 넓은 사람이었다.

‘투쟁 없는 역사도 없지만 관용과 배려가 없는 역사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절제와 유연성을 강조한 그의 어록 하나를 추가한다. 이 역시 새겨들어야할 바보 노무현의 귀한 말씀이다. ‘손에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가네, 사람 사는 세상이네’ 시인의 성숙한 시선은 그분이 시민을 향해 주문한 ‘관용의 정신과 타협을 아는 사람들의 연대’를 고스란히 반영하였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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