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가는 전봉준/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 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 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중략)/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 (민음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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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인은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고 그 이듬해 첫 시집을 냈다. 시인의 삶의 지향과 역사의 한 순간이 마주치면서 상상력으로 부려놓은 서정이 독자로 하여금 사람의 도는 무엇이며 사람이 어떠한 길을 걸으며 살아야 하는지를 풍성하게 사유토록 한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에 비춰진 모습만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처음 이 사진을 보았을 때 가마를 태워가는 모습이 의아했는데, 당시 전봉준은 포박당하는 과정에서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도저히 걸을 수 없었으므로 저렇게 가마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본영사관 구내에서 일본인 사진사에 의해 촬영된 사진은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의연했고 그 눈빛은 너무나 강렬했다. 교수대 앞에서 법관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하자, “나를 죽일 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나의 목을 베여 오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하여 컴컴한 적굴에서 암연히 죽이느냐”라고 꾸짖었다. 그 기개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형형한 눈빛, 정녕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이었다. 1895년 3월 처형된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의 단국대학교 야산에 버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장소를 특정하지는 못한다.

현재 정읍에는 전봉준 등 동학지도자의 무덤이 있지만 모두 시신이 없는 가묘이다. 1963년 10월3일 정읍 황토현에서 기념탑 제막식이 열렸을 때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참석해 “5·16혁명도 이념면에서는 동학혁명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1970년에 쓴 글 ‘나의 소년시절’에는 선친인 박성빈이 20대에 동학혁명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처형 직전에 천운으로 사면되어 구명을 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 사실은 성주군지에도 기록되어있으므로 사실에 가깝다고 봐야겠다. 흥미로운 것은 전두환씨의 경우다. 정권 찬탈의 정당화를 위해 벌였던 여러 작업 과정에서 역사 인물 가운데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을 찾는데 때마침 ‘전봉준’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족보학자 등을 불러다가 둘의 관계를 꿰어 맞춰보려 했으나 두 사람은 아무런 연관도 맥락도 없었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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