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殞命)/ 전봉준



時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自謨

愛民正義我無失 愛國丹心谁有知

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 사랑 정의 위한 길에 허물이 없었건만

나라를 위하는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 최현식 편저 『갑오농민혁명사』 (신아출판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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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의 향토 사학자 최현식씨는 1974년 5월 정읍군지에 수록할 자료를 모으다가 천안 전씨 족보에서 전봉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한시를 발견한다. 이 시는 ‘전봉준 장군’ 난의 여백에 ‘殞命 유시’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를 1974년 5월11일자 경향신문이 곧바로 보도하였고, 소설가 김동리의 번역을 함께 실었다. 시골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서 공부했다는 정도의 기록만 알려졌을 뿐 전봉준이 남긴 자료는 별로 없는 상태에서 소중한 절명시(絶命詩) 한 편을 건진 것이다. 세 마지기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이면서 한때 마을 훈장을 했던 그의 학식을 가늠할 수 있으며 아울러 고부 동학접주로 임명된 배경으로도 작용 했음직하다.

작성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니 전봉준의 글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농민 봉기 때 돌렸던 ‘사발통문’이나 ‘격문’, ‘포고문’ 등을 직접 지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전봉준이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 밝혔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을 위함이었다. 1894년 3월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니 그 본의는 백성들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기 위함인데, 안으로는 탐관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한다....”

이렇게 해서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 명이 넘었다. 1894년 4월 그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로 진격 1894년 5월11일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호남일대를 장악한다. 그 전승일이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삼은 배경이다. 다급해진 조정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한다.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제물포에 들어왔다. 연이어 청일전쟁의 발발로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마침내 9월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를 내걸고 다시 봉기하였다. 전봉준은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 명을 이끌고 11월 우금치 싸움을 치렀으나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만다.

이 전투의 패배는 화기의 열세가 주원인이었다. 조선의 관군과 함께 농민군 공격에 나선 일본군이 미국에서 수입한 개틀링 기관포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력에서 게임이 되지 않았다. 그 개틀링 건으로 난사를 해댔으니 이는 대량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농민대중의 밑으로부터의 힘을 결집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조선을 침탈하려는 일본의 야욕을 저지함으로써 국가의 근대화를 이루려 했던 전봉준의 개혁 의지는 일본의 군사력 앞에서 무참하게 꺾이고 만다. 그러나 그가 영도한 갑오농민혁명은 조선의 봉건제도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실증했고, 민중을 반침략 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세상은 변했지만 받들어 마땅한 정신으로 41세 나이에 절명한 의로운 영웅 전봉준의 ‘나라 위하는 일편단심’을 되새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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