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젊은이의 죽음/ 권순진

둘째가 친구의 뼛가루를 수성못에 뿌리고 왔다. 강에 뿌리려다 생각날 때 찾기 쉽게 몰래 시내 가까운 유원지 못에다 뿌렸단다. 그 친구는 막 만 열여덟을 넘긴 어정쩡한 미성년이었다. 열둘에 갈라선 부모가 둘 다 아이 맡기를 기피해 외할머니 밑에 자랐으나 속속들이 세포가 망가지면서 그 지경이 되었단다. 외삼촌이 입원시켜서 어찌 손을 써보려 했다지만 이미 많이 늦어버렸단다. 죽어 재가 되고서야 아이의 어미가 달려와 내가 죽일 년이다 울부짖었단다. 친구들은 누구하나 따라 울지 않았다고 한다. 그 애비는 재를 물가에 흘려보내려할 쯤에야 나타나 돈 이십만 원을 건넸으나 친구들은 그 돈을 기어이 받지 않았단다.// 난 둘째의 얘기가 그 흔한 신문의 사건 사고 한 줄 기사의 낭독인줄 알았다. 어른들에 대한 적개심이 잡초처럼 마구 자랄지 모른다는 막연한 염려는 했지만 어쩌면 그 나이에 그런 비열한 충격의 경험은 인생살이 전체로 볼 때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빌어먹을 통빡을 굴렸다. 하지만 죽은 애 아비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처지에 이내 몸을 진저리 쳤다. 내 아들의 죽은 친구여! 내 자식이 너의 죽음 앞뒤로 슬퍼하고 괴로워한 만큼 나는 그 십분의 일도 애도하지 못했음을 용서해 다오. 오히려 배면에서 내 자식의 멀쩡함을 안도했고 정신적 성장의 밑거름이나 되는 양 멋대로 변용하여 자위했던 것을 용서해 다오.// 허구한 날 천부당만부당 억울하게 죽어가는 어린 생명들을 보고 내 비로소 고개 숙여 서러워하며 분노하노니 부디 사랑과 평화 가득한 곳에서 잠들다 좋은 옷 다시 얻어 입고 다른 세상으로 오기를......

- 시집 『낙법』 (문학공원, 2011)

...................................................

작은아들이 지금 만 서른일곱이니 19년 전 일이다.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동네친구라 나도 한두 번쯤 보았을 아이였겠다. 친엄마의 전화를 받고 나간 12살 어린 소녀는 그 길로 영원히 되돌아오지 못했다. 의붓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토로한 뒤였다. 며칠 전 채널을 돌리다가 TVN에서 방영하는 ‘그것만이 내 세상’을 운 좋게 거의 처음부터 봤다. 가정폭력을 다룬 이 영화를 보면서 여중생살해사건과 이 ‘시’가 생각났다. 구체적으로 신체에 위해를 가하거나 굶기는 따위의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어른이 아이를 보호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 역시 아동 학대에 속한다.

여기서 조금만 도가 지나치면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않거나 무지한 정도를 넘어, 말 그대로 인간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지른 막장 부모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가정폭력은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그 폐해를 남긴다. 유년의 기억은 어른이 되어서도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어 인간의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특히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폭행을 당하면 정상적인 성장이 어렵다. 가정폭력, 막장부모 대물림 문제에 대해 사회적으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대책을 마련할 때다. 그것만이 모두가 건강한 ‘내 세상’을 향해가는 첫걸음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